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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날씨 Oct 24. 2021

자꾸만 싸우고 싶어

당신을 잡고 뒤흔들고 싶어

"우리 요새 평화롭지 않아요?" 그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한다. 그러고 보니 안 싸운 지 꽤 되었다. 그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좀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싸운다는 단어는 사실 우리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딱 들어맞는 느낌은 아니다. 서운함 토로, 의견 개진, 의도 설명... 같은 것들이 연인 간의 싸움 요소라면 우리도 싸우는 게 맞겠지만, 싸운다 안에는 어쩐지 감정적인 폭발, 가시 같은 말로 서로 상처 주기 같은 요소가 들어있는 것 같아서 그렇다. 정확하지 않다는 느낌. 아니면 우리의 관계를 보통의 것과 차별화하려는 은근한 우월감이 있는 걸까?


그래서 연애할 당시에는 얼마나 싸우냐는 호기심 어린 질문에 말간 표정으로 "우리 안 싸워요"라고 했지만, 이제는 우리가 하는 것들 - 서운함 토로, 의견 개진, 의도 설명, 그리고 그것들에 짜증을 싣기도 하는 모습 - 이 싸움이라고 인정한다. 이게 싸움이 아니라면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아직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했기도 하고, 대체로 나의 요구와 그의 "내가 잘할게"라는 수용으로 구성되었던 연애 때의 갈등과 달리, 이제는 그가 절반의 지분을 갖고 제대로 된 상대 역할을 하는, 팽팽한 둘의 다툼이 되었기 때문에라도 이건 싸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와 심각하게 마주 앉아서 "그건 당신의 이런 마음 때문인 거잖아요. 그러면 나는 저렇게 느껴져서 기분이 나쁘죠"라고 그의 마음과 내 마음을 분석해서 설명해야 하는 것은 참으로 피곤하고 진 빠지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심장이 뛰고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그 어느 때보다 그에 대해서 생각하고 나에 대해서 생각한다. 우리에게 있었던 일을 엄청난 집중력으로 분석하고 서로를 설득하고 결국 끝에 가서는 서로의 저 밑바닥에 있는, 평소라면 웬만해서는 만나기 힘든 핵심적인 감정과 욕구를 만나고야 말 때, 나는 짜릿함에 몸을 떤다.


이건 몰입의 시간이다. 그와 나의 너무나 인간적인, 알고 보면 새로울 것 없는, 그러나 평온한 일상 속에서 제법 사회인의 얼굴로 의무와 역할을 해나가다 보면 어느덧 꺼내놓기 어색해지는, 중심 욕구를 발견하는 시간이다. 잔뜩 취약해진 얼굴로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말하는 그를 보면 내 사랑의 불꽃이 타오른다. 반대로 나의 욕구를 말하고 나면 나는 너무도 홀가분해지는 나머지, 마음이라는 게 통째로 사라져 버리는 것 같다. 이거면 된다, 정말로 다른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이걸로 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평화로운 일상의 무자극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고 싶어 진다. 그의 눈과 심장과 뇌를 뒤집어 흔들고 싶다. 그리하여 진짜 그를 만나기를, 진짜 나를 만나기를, 우리라는 세계의 몰랐던 영역을 만나기를 바라며, 기쁜 마음으로 고통을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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