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를 상상하면 어떤 책을 가장 먼저 떠올리시나요?
나는 스물네 살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책을 만들고 있는 편집자다. 약 16년, 나는 그동안 몇 번이나 내 직업을 소개해 보았을까.
"제 직업은 편집자예요. 책 만들어요, 책."
대부분 '우와, 우와'하며 감탄사를 연발하다가 본격적인 질문을 시작하는데, 내 대답을 들은 뒤에는 일반적으로 잠깐의 정적이 흐르게 된다.
"편집자요? 그럼 어느 작가님 책을 만드신 거예요? 소설? 에세이? 베스트셀러도 있나요?"
"저는 교재 만들어요. 수험서."
수험서도 종이와 활자로 이루어진 같은 책인데, 왜 급 편집자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걸까.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편집자 인터뷰는 거의 모두 찾아 읽어 보지만, 역시 수험서 편집자에 대한 인터뷰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럼 나는 왜 넓디 넓은 책의 범위에서 수험서를 선택하게 되었을까.
처음부터 수험서 편집자의 길만 걸었던 건 아니었다. 첫 회사는 작은 출판 기획사무실이었다. 주로 IT 관련 원고를 대형 출판사에서 넘겨받아 편집과 교정교열을 대신 진행해주던 곳이었는데, 관련 자격증이라곤 정보처리기능사밖에 없던 내가 왜 그곳에 합격되었는지는 아직도 아이러니하다. 아마도 적은 연봉을 군소리 없이 받으며 책 만드는 일에 열정만으로 도전한 젊은이면 되었던 그런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부모님 그늘을 도망치듯 벗어나 무작정 상경한 나에겐 얼른 일을 배워 안정적인 월급을 받고, 안정적인 삶을 찾는 게 가장 큰 목표였다. ‘그래, 관심 없는 분야면 어때. 뭐든 하다 보면 정도 들고 실력도 늘겠지.’ 하지만 6개월 뒤, 역시 어느 정도 해당 분야에 관심이 있어야 일머리도 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신입사원이던 내게 주어진 업무는 교정교열도, 적자 대조도 아니었다. 원고에 맞춰 프로그램을 하나씩 실행해 보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포토샵에 관한 원고라면 포토샵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설치하고, 원고에 주어진 과정을 하나하나 따라 해 보며 막히는 부분은 없는지, 오류는 없는지 직접 체험(?)해 보는 것이었는데, 매일 야근을 해도 속도는 더디기만 했고 포토샵도 버겁던 내게 자바스크립트 어쩌구의 원고를 던져주던 날 밤, 나는 조용히 짐을 싸서 회사를 빠져나왔다.
두 번째 회사는 공무원 수험서를 주로 출판하던 곳이었는데, 종종 번역소설과 실용서도 출간하는 곳이라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의 문제는 너무 다방면의 원고를 접하다 보니 가끔 나는 무엇을 잘하는, 무엇을 좋아하는 편집자인지 모르겠다는 거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입사 1년즈음 되던 날, 이직 혹은 장기적인 편집자의 길을 위해서라면 이제는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장 덜 힘들어하고, 가장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있었던 원고는 무엇이었는가. 어느 날 새벽, 교정지 위에 엎드린 채 잠깐 졸다 깨었을 때, 정리해둔 표 하나를 바라보며 스스로 만족스러워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복잡한 내용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눈에 잘 들어오게 재구성하고, 어딘가 어수선했던 설명을 하나씩 정리해 가는 그 과정이 꽤 즐거웠다는 걸.
그때 알았다. 나는 화려한 문장이나 감동적인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지식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듬는 일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게 바로 수험서였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가장 간절한 순간, 그 곁에 함께 있는 책. 반짝이는 이름도 없고, 주목받지도 못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버팀목이 되어 주는 책. 나는 그런 책을 만든다. 그리고 그 사실이 지금의 나를 편집자로서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화려하진 않아도, 꾸준히.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다음'을 위해 책상 앞에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