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직업병 1
"당신이 내 인생을 망쳤으니 책임지세요!”
살면서 이런 말을 들어볼 확률은 얼마나 될까.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며 숨이 막혔다.
내가 누군가의 인생을 망친 사람이 되었다니.
대한민국에서 한 해에 치러지는 시험은 총 몇 종이나 될까?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주관하는 국가기술자격만 해도 500종 이상이고 국가고시, 수능, 공기업 시험, 어학 관련 시험, 모의고사, 민간자격시험까지 합치면 600종은 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누군가는 간절한 마음으로 매일 긴 시간을 책상 앞에서 고군분투한다.
나도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에 잠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새벽부터 강의를 듣기 위해 학원에 모인 수업 첫날, 강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하루 15시간 이상을 꼬박 앉아 공부할 자신이 없다면 지금 이 강의실을 떠나 다른 미래를 준비하세요.”
물론 나는 곧바로 강의실을 떠나진 못했고, 두 번의 불합격 끝에 결국 시험을 포기했다. 공무원은 사실 나의 꿈이 아니었다. 전공을 살려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고, 안정적인 직업이라 무작정 공무원 공부를 시작했는데, 철이 없었던 건지 간절함이 부족했던 건지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으면서 탈락이 괜히 억울했다.
하지만 학원에서 열정적으로 공부하던 그 친구들의 모습은 편집자로 일하는 내내 큰 자극이 되었다. 그들의 간절함을 기억하기에 책을 만들 때 늘 긴장했고, 더 진지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원고를 꼼꼼히 검토하고, 이론을 보완하고, 정답과 해설을 몇 번씩 확인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해설은 독자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해 저자에게 더 쉬운 설명을 끝까지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출판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 어디서 어떤 오류가 발생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책이 출간된 뒤 오류가 발견되어 정오표를 만들어야 할 때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리고 경력이 쌓여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내 불안증도 점점 악화되어, 마감 앞뒤론 잠을 못자거나 밥을 잘 먹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독자에게 전화를 받았다. 다짜고짜 내가 그 책의 편집자냐며 따지기 시작했다. 시험 전날까지 기출문제를 달달 외웠는데 책에 정답이 잘못 표시되어 비슷한 유형의 문제를 그대로 틀렸다는 것이다. 한 문제만 더 맞았다면 합격할 수 있었는데, 그 한 문제 때문에 불합격했고 인생이 망가졌으니 내가 책임지라는 말이었다. 나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고, 그 뒤 불안증은 더욱 심해져 정신과 상담을 시작하게 되었다.
편집자는 저자가 아니다. 그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다. 저자가 아니면서도 저자와 디자이너, 그리고 독자 사이에서 원고를 조율하고 완성도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결국 모든 책임은 편집자에게 돌아온다. 이런 책임과 부담이 강박으로 다가오면서도, 그럼에도 이상하게 이 직업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정신과 약까지 먹으며 인쇄를 넘겨야 하냐고,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냐고 묻지만 이상하게 나는 이 직업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와 누군가의 책상 위에 얹어질 때 느끼는 벅참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의사선생님은, 꽤 많은 편집자들이 나와 같은 증상으로 병원을 찾는다고 말씀하셨다. 완벽할 수 없는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강박, 사람의 손을 거치는 과정에서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는 오류 앞에서 스스로를 책망하는 마음이, 결국 몸과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는다고 했다.
처음에는 나만 못나서 그런 줄 알았다. 실수가 반복될 때마다 ‘내가 더 꼼꼼했으면’, ‘내가 조금만 더 살펴봤으면’ 하는 자책으로 밤잠을 설쳤다. 시간이 흘러도 불안은 멈추지 않았지만, 지금은 모든 편집자가 안고 가야 하는 숙명 같은 거라 여기며 일을 계속 하고 있다. 그리고 종종 그 독자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이 한 줄이, 이 한 글자가 누군가의 합격과 불합격을 가를 수도 있겠구나.’
결국 책이라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시험의 무기였고, 그 무기를 만드는 사람은 나였다.
내가 만든 무기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면, 그건 변명의 여지 없이 내 잘못이었다. 그러나 모든 편집자들이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쉽게 무너지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완벽할 수 없지만, 누구보다 완벽을 향해 애쓰는 사람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