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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의 사직서

편집자의 직업병 2

by 괜찮아

편집자로 일하며 자주 마감과 씨름하다 보면, 일과 삶의 경계는 종종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집에 돌아와도 머릿속에 교정지가 따라붙고,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저자의 톡을 읽고 답을 하고 나면 잠들어야 할 시간이지만 마음이 다시 편집자 모드로 깨어난다.

그렇게 눈을 감고서도 내일 할 일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닐 땐 차라리 다시 책상에 앉아 한 글자라도 더 읽다 자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특히 나는 처리하지 못한 업무나 걱정거리가 있으면 다른 일은 1도 신경을 못 쓰는 사람이었다. 그게 심해지면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을 넘기지 못해 헛구역질을 하곤 했다.



아침 일찍 출근한 어느 날, 이미 부장님은 출근해서 자리에 앉아 계셨는데, “안녕하세요.” 인사를 드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흐느끼며 눈물을 훔치는 소리뿐이었다. 너무 놀라 부장님께 달려가니, 서러움이 폭발하기라도 하신 듯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우시는 게 아닌가.


당시 나는 미혼, 부장님은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 한 명이 있었는데, 매일 야근으로 늦는 엄마에게 구멍이 난 양말을 보여주며, “엄마 내일은 꼭 새 양말 사줘”라고 울먹이며 말했다는 것이다. 사실 아이는 이 말을 엄마에게 아주 여러 번 했는데, 일에 매몰된 엄마의 기억 속에선 그 말이 매번 뒤로 밀려나 있었다. 급한 교정, 급한 인쇄, 급한 회의... 아이의 양말은 늘 ‘내일 사야지’로 미뤄졌고, 그렇게 며칠이 흘러버린 것이다. (그때도 새벽배송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지)


부장님은 그날 아침 작은 발가락 하나가 쏙 빠져나온 그 구멍을 보고, 딸의 울먹이는 얼굴이 뒤늦게 뇌리를 치고 들어왔다고 했다. 그 순간 너무도 미안해서, 너무도 서러워서, 출근을 하자마자 참았던 감정이 터져버린 거라고 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워킹맘’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실감했다. 회사에서는 완벽한 리더, 집에서는 든든한 엄마… 그 두 세계 사이를 오가는 일이 얼마나 고된 줄, 그전엔 몰랐다.

그리고 동시에, 내 안에도 언젠가 저런 눈물 한 방울이 쌓여가고 있지는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장님은 바쁜 신학기 원고를 모두 마감하신 뒤 아이의 기억 속에 다양한 엄마의 모습으로 남고 싶다며 사직서를 내셨고, 그 뒤론 멋진 프리랜서의 삶을 살고 계신다.



물론 모든 편집자들이 나처럼 예민한 건 아니다.

경력 5년 차인 우리 회사 막내는 마감 후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며, 그날은 꼭 조각케이크를 사서 집에 간다. “이왕 고생했으니까 스스로 상이라도 줘야죠!” 하며 활짝 웃는 얼굴을 보면, ‘아, 저렇게 일과 감정을 분리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구나’ 싶다.


나는 마감이 끝나도 한동안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책이 서점에 깔릴 때까지, 혹시라도 오탈자가 있진 않을까, 독자 문의가 오진 않을까, 마음이 늘 어딘가 붙잡혀 있었다. 그러다 보면 나를 위한 상은커녕, 자책과 걱정을 포장한 불면증만 남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피로가 나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는 걸 느꼈다. 작은 실수에도 쉽게 무너지고, 잠들기 전까지는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없었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방식으로 책임을 다하려 했던 셈이었다.



나는 괴롭지만 조금씩 일의 방식을 바꾸었다. 책상 앞에서 모든 걸 끝내지 않아도 조급해하지 않기 위해 마음의 여유를 갖고 흐름을 믿는 연습을 시작했다. 물론 10년 이상 되풀이한 습관이 쉽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멈추고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비로소 믿게 된 편집자다. 일과 삶의 경계를 아주 정확히 그을 수는 없지만, 그 경계에 나를 위한 여백 하나쯤은 남겨둘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대책도, 계획도 없이 퇴근만 앞서는 후배들을 보면 속으로는 한숨이 나오는, 그런 꼰대 편집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도 그 시절엔 미처 몰랐다. 어디까지가 일이고, 어디부터가 나인지, 그 선을 알아가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그래서 조금은 잔소리를 줄이고, 대신 이런 말로 끝맺는다.

“내일도 책상에 앉아야 하잖아. 그러니까 오늘은 좀 덜 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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