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로 떠나기 전, 여자 친구는 자기가 없는 한 달간 내가 무엇을 하고 지낼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글쎄. 그동안 못 읽었던 책도 읽고, 밀린 영화도 보고, 가끔 친구들도 만나겠지? 거짓말이었다. 나는 나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그저 종일 게임만 할 거라는 것을.
나름대로 계획은 있었다. 쌓아둔 포트폴리오를 정리해 둘까. 최근 들어 글을 쓰지 않았으니, 글이라도 써 볼까.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는 싶었다. 다만 심히 공들인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낼 자신은 없었다. 평소의 나라면 분명 뭔가를 하려다 중간에 그만둘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의지박약으로 두달동안 36장짜리 필카를 전부 찍지도 못할 정도다.
나는 어떤 일이든 마감이 주어지지 않으면 끝내려 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시작은 할 줄 알지만, 마무리하는 법을 모른다. 초등학생 때 그린 만화는 1부를 끝으로 휴재에 들어갔다. 강력한 마왕을 때려잡으러 전 세계의 파이터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도입부는 지금 봐도 그럴싸했다. 때론 동료를 잃기도 하고, 새로운 동료를 얻기도 하며 난관을 헤쳐나가는 무리들. 적을 하나하나 무찌른 십수 명의 파이터들이 1부를 어떻게 마무리했을까? 시시하게도 좋은 호텔에서 맛있는 뷔페를 먹는 게 끝이었다. 고단한 이들에게 작가가 주는 일종의 포상휴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파이터들은 마왕의 얼굴조차 모른 채 뷔페를 처먹고 있다.나 역시 마왕의 모습은 구상조차 하지 않았다.
글을 쓰고 마무리하는 건, 파이터들과 마왕의 마지막 승부를 그리는 일만큼이나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득 길을 가다가 떠오른, 어떤 그럴싸한 주제를 메모장에 적어 두고는 집에 와서 키보드를 두드려도 봤다. 그 자리에서 약 한 시간 정도 글을 써 내려가다, 약 70%쯤 완성이 되자 늘 그렇듯 묘한 만족감에 취하곤 했다. 이 정도면 됐지! 어느새 나는워드 창을 끄고게임을 켜고 있었다.
자기반성을 한 그림일기 중 하나. 인스타그램 @30fails
이 습관은 내 업무에도 지장을 끼쳤다. 회사에서 파트장을 맡은 나는 상반기가 끝날 무렵 팀장으로부터 매출 평가지표를 짜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번에도 나는 그럴싸한 수식과 그래프를 가득 채워 두고는, 적당히 계산한 숫자를 엑셀에 기재한 후 결론을 내지 않은 채 저장 버튼을 눌렀다. 세상에! 벌써 이만큼이나 했잖아? 라면서 30%를 여전히 남겨둔 채 엑셀을 종료했다.
나는 이것을 '70%의 벽'이라고 부른다. 이 글도 사실은 여기서 멈춰야 나답고 자연스럽다. 이제 30% 남았는데 뭘 어떻게 써야 할지 여전히 감이 안 오기 때문이다. 억지로 이어가 보자면 이렇다. 나는 내가 글을 끝내지 못하는 이유를 어린 시절 배운 '글의 구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이나 이야기를 쓸 때는 반드시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이라는 완성된 형태를 갖고 있어야 한다. 에세이 혹은 논술형태의, 주제가 있는 산문을 쓸 때는 서론 - 본론 - 결론이 있어야 한다. 형식의 강박에 매여 있으니 글을 마무리짓기 무서웠던 거다. 본론까지는 좋아. 하지만 결론은 뭔가 거창해야 하지 않을까? 뭔가 더 좋은 마무리가 없을까? 확신이 없으니 차라리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마무리를 안 짓다 보니, 뭔가는 해야겠다 싶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쓴 글을 손보는 것도 또 다른 이유다. 글쓰기에 할애하고픈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정작 마무리도 못 지어놓고 퇴고를 한다. 써둔 70%를 만족스럽게 손 보고 나면, 이제는 피로감이 몰려온다. "자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합리화한 후 30%를 남겨둔 채 저장 버튼을 누른다. 지독한 버릇이다.
안되는 건 결국 안되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얼마 전 후배와 함께 점심을 먹다 이런 얘기를 들었다. "습관을 만들려면 그 난이도를 내가 매일 할 수 있는 최소한으로 설정해 둬야 하더라고요." 그는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야심 차게 헬스장을 끊어 '매일 30분 달리기, 30분 웨이트'를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 또 언제 가서 한 시간이나 운동하나..."라는 싫증이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그래서 그는 목표의 허들을 낮췄다. 10분만 달리고 웨이트도 10분만 하자. 내가 정말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운동을 해도 괜찮아. 그렇게 심리적 허들을 낮춰 매일 할 수 있도록, 쉽게 습관을 들였다는 것이다.
글쓰기가 평양냉면이라면, 글을 벌써 수십 개는 끝냈을텐데 .
글쓰기도 이렇게 시작하는 게 좋다. 만약 누군가 "난 매일 멋진 글을 쓸 거야"라고 다짐한다면, 그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대신 당장 메모장을 열어 '완성된 무언가'를 매일 써 보자. 퀄리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70%의 벽을 넘지 못할 것 같다면 70% 수준에서 마무리 문단을 쓰자. 구조가 확실한 산문을 쓰기 어렵다면 뭔 소리인지 모르는 운문을 애매하게 적어두고는 완성된 한 편의 시라고 생각하자. 나를 과소평가하자. 내가 무언가를 잘할 것이라는 생각을 집어치우고 개똥 같은 것이 탄생해도 일단 완성하자. 시작이 반이라는 생각은 집어치우자. 완성의 보람은 70%의 애매한 만족감을 이기는 유일한 대체재임을 잊지 말자.나도 이 글을 결국 이렇게 끝내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