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필소녀 Feb 23. 2021

시골의 마음들

시할머니의 장례식을 마치며

발인이라는 것을 직접 겪어본 적은 없다. 친조부모님과 외조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너무 어렸거나, 너무 먼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었거나, 혹은 회사에서 외조부상에는 공식적인 휴가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 내가 발인의 주체가 되거나 장지에 가 볼일은 없었는데, 며느리가 되면서 그것을 처음 겪었다.


일반적인 장례식도 아닌, 코로나 시국의 장례는 참으로 단출했다. 육개장에 술잔을 기울이며 떠난 사람에 대한 추억을 나누는 것은 옛말이 되어있었다. 최소한의 인원, 최소한의 방문, 최소한의 식사, 최소한의 대화, 최소한의 시간이 허락되었다. 


검정 한복을 입고 삼일밤을 샐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최소한'이라는 규칙으로 열외 되었고, 장례식장에 불과 두세 시간 남짓을 있다가 시댁으로 돌아갔다. 시할머니의 자식과 배우자들만이 장례식장에 머물렀다. 코로나는 거의 일 년 동안 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의 방문도 금지시켰는데, 생을 떠나는 순간마저도 모든 가족의 상봉을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할머니가 유독 아끼셨던, 상하이에서 귀국하지 못한 손자까지도.


다음날이 발인이었다. 시댁에서 남편도 시어머니도 없이 보내는 밤은 길고 어두웠다. 저녁 8시만 되면 한밤중처럼 적막해지는 시골이지만 밤새 어지러운 소리가 많았다. 동네 개 짖는 소리, 겨울바람소리, 출처를 알 수 없는 요상한 논밭의 소리들까지. 가족이 떠난, 가족이 돌아오지 못한, 가족이 없는 시골의 밤은 그렇게 어수선했다.


다음날 오전, 화장터에서 운구차가 집으로 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코로나 시국에는 무조건 화장을 해야 했다) 장지는 집 근처의 선산이었다. 운구차를 맞이하러 시누이 가족과 함께 집 앞 큰길로 내려갔다. 

그런데, 길가에 웬 사람들이 군데군데 그룹을 지어 모여있었다.


아침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길가에 나왔지. 생각하는데 갑자기, 시누이가 사람들한테 인사를 했다. 아, 나오셨어요? 여기는 저희 새언니예요. 아.... 안녕하세요. 아이구 남편은 못 들어오고, 며느리 혼자만 왔구먼. 그래 착하다. 잘 왔다.


그렇게 많은 분들과 똑같은 인사를 했다. 모두 동네 분들이셨다. 그 마을에서 평생을 사신 분들. 할머니와 오랫동안 친구였지만 장례식장에는 올 수 없었던 분들. 그분들이 새벽같이 길가에 나와 운구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운구차가 도착하자 트렁크를 넣는 칸이 열리고, 할머니의 영정사진이 놓였다. 그 앞에 돗자리가 빠르게 깔렸다. 순간 작은 빈소가 되었다. 동네분들은 그렇게 차려진 빈소에서 할머니를 맞았고, 보냈다. 그리고 봉분과 함께 가족들이 장지에 가는 산길을 함께 걸어주셨다. 


내가 제대로 만나본적 없는 분들이었는데, 우리 이야기는 많이들 알고 계셨다. 서울서 직장 다녔다면서? 상하이 가서 산다면서 지금은 못 들어가지? 남편이랑은 그렇게 떨어져서 어떡해. 곧 만나게 될 거니까 너무 걱정 말고 응! 


생각해보면 동네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가 나에게는 없다. 제주도에서 태어났지만 농사를 짓는 시골도 아니었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알고사는 시대도 아니었다. 시골의 인심이 이렇고 저렇다는 것은 티비나 어른들에게나 듣고 살았다. 한편 모든 동네 사람들과 얼굴을 트고, 각자의 사정을 알고 산다는 게 매우 불편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네분들이 큰 길가에 서있었을 때,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모이셨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남편도 어머니도 없던 지난밤의 쓸쓸함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가족 없이 임종한 것도, 장례식에 가족이 모두 모이지 못한 것도 못내 외롭고 서러웠는데, 마을 분들의 대동으로 왠지 든든한 기분마저 들었다. 시골의 마음이란 서로 참견하고 오지랖을 부리고, 그리고 또 마지막을 기다려주고 새벽길에 나서 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모든 장례일정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와 마을 분들 한분 한분에게 모두 인사를 드렸다. 장례식장에서도 담담하시던 분이, 마을 어른들을 만나자 눈물을 글썽이셨다. 어머니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시댁을 떠나는 마음은 무거웠지만 그 전날 밤처럼 쓸쓸하고 어둡지는 않았다. 시골에는 여전히 내가 모르는 마음들이 남아있을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회사를 떠나고도 삶은 계속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