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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Nov 07. 2017

회사를 떠나고도 삶은 계속된다

시간계획자의 시행착오


회사를 그만두고 서야 알았다. 루틴한 일상의 위대함에 대해. ‘출퇴근’이라는 단순한 울타리의 견고함에 대해. 그 견고함으로 내 지난 근이 십 년의 생활이 그토록 단단하게 유지되었음을 나는 이제야 인정한다. 밤을 새워도, 지독하게 아파도, 끝없이 무기력할 때도, 기어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옷을 갖추어 입고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출근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서 정신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나면 그다음은 기계적으로 착착 돌아가던 날들.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시간에 맞춰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시간에 쫓기며 카피를 쓰고, 시간을 넘기며 매일 밤 일했다. 가끔씩 비 효휼적 프로세스를 비난하고 월급 노예로 살아가는 생활을 자조하며 동료들과 막간 시간을 보내면 하루 한 달 일 년이 훌쩍 갔다.


그 울타리가 진절머리 나게 거추장스러웠다. 출퇴근은 그 자체로 새장이었고, 쳇바퀴였고, 지겨운 굴레였다. 주말은 언제나 달콤했고, 일 년의 한 두 번 먼 곳으로의 휴가는 짜릿했다. 월요일 오후 두 시에 파리의 노천카페에 앉아서 남모르게 울컥했던 것은, 엽서에 등장하는 풍경도 한몫했겠지만 사실 그때 내가 고립된 산속의 견고한 울타리를 넘어 뛰쳐나온 양의 심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그리고 지지난해, 직장인이 아닌 자유인으로 유럽여행을 갔을 때였다. 처음 마주하는 아름다운 광경 앞에서도 조금도 울컥하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그곳은 충분히 감동적인 도시였지만, 마음 깊숙이 솟구치던 짜릿함은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 뒤에서 나를 바짝 쫓아오며 뒷목을 잡으려는 ‘출근’이 없었으므로 더 이상 심장이 터질 듯 쫄깃한 여행은 없었다. 나는 그저 풍경을 바라보며 무엇도 쫓아오지 않는 여유로운 시간을 걸었다.


인생에서 ‘출퇴근’이라는 울타리를 제거하고는 늘 그랬다. 처음 한동안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흥분하며 시간을 썼다. 최소한의 정기적인 스케줄만을 정하고 나머지는 탕진했다. 이제 막 탈출한 ‘정기적인 일상’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좋은 날은 그렇게 한없이 좋았다. 일 년에 한두 번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두 번씩 자유로운 삶으로부터의 행복감이 오기도 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이토록 널린 시간과 자유를 즐기기만 하면 될 것을.

직장을 떠난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들은 여러 방면으로 온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는 시간이다. 지난 밤늦은 시간까지 놀았다면, 다음 날 오전 수업을 포기하고 늦게 일어나면 된다. 날이 너무 좋아 더 걷고 싶다면 운동을 취소하고 더 걸으면 된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면 창가에 앉아 그저 밖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고, 머리를 쓰기 싫다면 당분간 일은 안 받으면 된다. 좋은 것만 하고 살기에도 인생은 짧다면서. 그렇게 모든 순간에서 강제와 규율은 사라진다. 그런데 모든 ‘하기 싫은 것’을 뺀 일상은 그저 좋기만 할까. 아무것도 ‘하기 싫은’ 마음이 너무 오래 지속될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언젠가 독감을 앓고, 천식이 발병하고 숨을 쉬기도 어려운 날들이 계속되자 모든 것이 ‘하기 싫음’이 되어버린 때가 있었다. 당연히 꽤 오랜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약을 먹고 차도가 생겨도 ‘하기 싫음’은 멈추지 않았고, 그 마음은 결국 모든 것의 ‘의미 없음’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강제와 규율이 없었으므로 나는 한없이 무기력 해졌다. 나를 일으켜 세워줄 것은, 오직 내 자유의지 밖에 없었다. 당연히 바닥을 치는 날이 오고, 좋은 날도 다시 오고, 자유의지도 서서히 회복되었다. 하지만 무기력한 날들은 감기처럼 잊지 않고 찾아왔다. 특히 한국에 잠시 갔다가 상하이로 돌아올 때면 꽤 긴 시간 정신을 수습해야 한다.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가, 그것들이 재가동될 때의 에너지는 늘 생각보다 크게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거운 시간도 낭비되는건 쉬웠다.


직장인이었던 시절의 카드 값보다도 시간을 더 흥청망청 쓰고 나서야, 현실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언제까지 ‘새장을 탈출한 새’의 심정으로 살 것인가. 이전과는 다른 세계에서 정착하는 법을 이제 배워야 하지 않은가. 우선 일상의 작은 시간들을 엮어가는 것부터 시작하자. 생각해보니, 직장을 떠난다는 것은 ‘시간 계획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예전의 그것과 유사한 쳇바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시간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 한 세계를 떠난 자가 새로운 세계를 다시 쌓아 올리는 최소한의 일. 그리고 그것은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시작될 수도 있다.



며칠 후부터 기타를 배우기로 했다. 빈 시간에는 전보다 일을 좀 더 많이 하기로 했다. 삐걱거리던 몸에 윤활유를 바르는 기분으로. 역시 세상에 ‘저절로 돌아가는 일상’은 없었다. 내 몸을 굳이 일으켜 운동을 시켜주고,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만들어 주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하고, 새로운 일들을 시작하게 하는 타자도 없다. 오직 내 나름의 시간계획으로,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된다.


시내 카페에 나와 앉아 노트를 열었다. 진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나만의 ‘시간 계획’을 하나씩 써내려 갔다. 써본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정리되었고, 계획되었고, 안정되었다. 그렇게 상하이에서의 세 번째 가을을 맞는다. 여전히 내 일상은 온전히 재건되지 못했고, 다시 쉽게 휘청거릴 수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카피라이터 비기너 시절을 반추하며, 지금 또한 ‘시간 계획자’ 비기너의 시행착오라 믿어 본다. 다행히 이 일에는 경쟁상대도 인사평가자도 없다. 심지어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는 인생의 장기 프로젝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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