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탈출에서 제주살이로
열아홉에 제주탈출에 성공했다. 서귀포 남쪽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볼 때마다 제주를 알카트라즈 감옥처럼 생각했다. 저 너머의 삶을 꿈꿨다. 제주의 여고생은 대부분 그런 마음을 품고 산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공식적으로 이 섬에서 독립했다. 독립에 대한 꿈은 두렵고도 달콤했다.
비밀인데 조용필의 '꿈'이라는 노래를 들으면 곧잘 운다. 내 세대의 노래도 아닌데 어느 날 그 가사를 듣고선 나도 모르게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이후로는 그 노래만 들으면 서울에서의 '독립 세월'에 대한 모든 '꿈'과, 그 뒷면의 처절함이 총체적으로 뒤섞여 감정이 뜨거운 용암처럼 분출한다. 특히 김윤아의 버전이 그렇다.
상하이의 생활도 많이 다르지 않았다. 설렘과 꿈과 두려움과 고독함 서러움과 짜릿함이 마라탕 재료들처럼 섞여 끓어올랐다. 마라탕만큼이나 상하이의 독립생활도(물론 남편이 함께했다) 맵고 중독적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코로나는 중력처럼 나를 고향 제주로, 순식간에 끌어당겼다. 언니의 집에서 다시 가족생활이 시작됐다. 가족이 늘 그렇듯, 서로가 선을 넘으며 걱정하고 챙기고, 그러다 싸우고 화해하고, 상처받고 아물고, 울다가 웃다가, 함께 있어 좋다가 싫다가, 불편하면서도 편안했다.
식구들 속에서 '코로나 중국 엑소더스' 충격은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내집이 아니지만 나름 안정된 생활을 찾기도 했다. 그 가족들로 인해 기쁘기도 슬프기도 했지만, 가족한테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내 멘탈은 나락으로 떨어졌을것이다.
인생 두 번째 독립이다. 상하이에 본래의 집과 남편을 여전히 두고도, 제주 일년살이를 정식으로 시작한다. 열아홉의 첫번째 독립 때와는 기분이 사뭇 다르다. 이제 내게 십대의 에너지와 호르몬은 남아 있지 않으니까. 마트 한번만 다녀와도 기가 빨린다. 다만 오랜 자취경력과 직장생활로 얻은 '요령'을 믿어보기로.
풀옵션의 오피스텔에는 모든 게 마련되어 있었다. 몸만 들어가면 되겠네.라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필요한 게 백천개였다. 손톱깎이 돌돌이 수저 그릇 냄비 후라이팬 밥솥 토스터 에어프라이어 드라이기 수건 한 장까지 다. 하나하나 다 사면되지. 일도 열심히 하는데. 돈 벌어 뭐하나.라고 스스로 어깨를 두드리지만, 돈은 태권도 10단의 송판깨기 만큼 쉽게 많이 깨진다.
현재 고3인 조카 1호의 꿈은 지난날의 내 꿈과 같다. '제주탈출'. 자기 말로는 모든 자유가 속박된 '이 집구석 탈출'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 마음이다. 하지만, 마음 한편 '니가 독립인생에 앞으로 닥칠 일들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냐'며 낮은 코웃음이 나기도 한다. 다 겪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고됨도 더덕처럼 질겅질겅 씹다보면 쓴맛 뒤 단 즙도 나오기 마련이다. 미리 말해줄 필요도 없다. 너도 언젠가는 '조용필의 꿈'을 들으며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 그런 날이 올 것이고, 그렇게 어른이 될 것이다.
인생의 첫번째 독립은 '제주탈출'이었는데, 두번째 독립은 '제주정착'이 되어버렸다. 하루는 제주도에 발을 디디고 인생을 가꾸는걸 상상하다가, 하루는 내 일상이 버젓이 남겨진 상하이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다가, 하루는 내 일의 본거지인 서울에 가는 상상을 한다. 쉽게 써지지 않는 답. 어떤 답을 써도 제출할 수 없을 것 같은 답안지다.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일년은, 어차피 남편을 만나지도,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올해는, 제주도에서의 인생 두번째 독립을 즐겨보기로 한다.
내가 잊고지내던 사이, 제주는 매일 새롭게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열아홉의 그때와 다를 것 없이 눈 덮인 한라산은 여전히 멋있고, 에메랄드빛 바다는 아직도 눈부시다. 영원한 것들과 새로운 것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더 아름다워지는 섬. 제주는 더 이상 알카트라즈 감옥이 아니라 육지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환상의 섬'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조카가 이런 마음으로 돌아오는데도 한 이십 년이 걸릴 테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네 인생의 첫 번째 독립, 제주탈출, 가족탈출, 혼자만의 방.
그렇게 어른이 되는 길을, 응원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