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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계적 글쓰기 Oct 03. 2020

사람을 파는 시장

채용시장이라는 표현이 불편한 이유

노량진 수산시장에서는 광어가 1kg당 15,000원이다. 그 옆 동네 광장시장에서는 빈대떡이 하나에 5000원, 저 멀리 대구 서문시장에서는 납작만두 한 접시가 3500원이다. 시장에는 판매가자가 있고, 구매자가 있고, 그리고 가격이 있다. 그래서 그 옆 취업시장에서 취준생(취업준비생)이 최저 연봉 2200만원에 인생을 파는 걸까. 왜 우리는 취업시장이라고 부르게 됐을까.      


채용시장 - 기관이나 회사 등에서 일정한 기준에 있는 사람을 골라서 쓰는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을 의미     


취업을 원하는 취준생과 채용을 원하는 기업, 이 관계망이 형성되는 온·오프라인 공간을 통칭해 언론과 미디어는 흔히 취업시장(구직시장)이라고 표현한다. 취업시장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건 IMF 이후인, 1999년쯤부터다. 물론 그 이전에도 비슷한 용어가 있었다. 인력시장과 노동시장이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대해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거래가 이뤄지며,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따라 노동력 상품의 가격(임금) 및 활용조건(근로조건)이 결정된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말 그대로 시장은 판매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사전에 정의된 대로 일자리(노동력)가 거래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싶지만, 종종 사람(취준생)이 거래의 수단으로 되는 것은 아닌가 싶은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의심스러운 증거는 또 있다. 취업시장이라는 용어가 귀에 자주 들릴 때쯔음, 같이 생겨난 신조어인 스펙(SPEC)이 그것이다. ‘specification’의 준말로, 원래는 오디오 관련 장비의 기능을 뜻하는 단어지만, 한국에서는 취업에 성공하기 위한 자격 조건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사람을 부품에 비유한 셈이다. 회사라는 기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한 소모품. 특정 교육과정을 이수하거나, 일정한 시험 점수를 획득하면 동일한 과업을 수행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하는 식이다. 영어 단어니까 해외에서 먼저 사용되지 않았냐 싶겠지만, 당연히 해외에서는 이런 단어를 쓰지 않는다. 대신 지원을 위한 최소 자격요건인 ‘qualification’을 사용한다. 지원 자격 요건이 달성되면 그 다음부터는 사람을 중심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구직자들도 이에 영향을 받는다. 채용을 하는 회사에서는 정작 스펙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채용에 목마른 구직자들과 그들의 주목을 받으려는 미디어가 주로 쓴다. ‘당신이 불합격한 이유는 스펙 때문입니다’ ‘합격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스펙이 필요합니다’와 같은 문장은 취준생들의 클릭을 부른다. 구직자의 역량이나 태도, 성장가능성보다는 이미 증명된 성적, 실적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커지는 것이다. “이 제품은 우유, 땅콩, 토마토, 쇠고기, 호두, 닭고기, 새우, 조개류를 사용한 제품과 같은 제조시설에서 제조하고 있습니다.” 마치 상품 뒷면에 표기돼있는 제조일자, 원재료, 포장재질, 영양정보처럼 구직자들은 상품화되고, 이를 취업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를 규격화시켜버리는 셈이다.        


그간 우리 사회는 성공에 등급을 나누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표준화된 교육을 강요해왔다. 사람마다의 고유한 특징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동일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수단으로 노동자를 판단했다. 기준(스펙)을 맞추지 못한 사람은 취업을 번번이 실패하기 일쑤였고, 전체 기준과 다른 특별한 사람들은 공동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을 받았다. 취업시장이라는 용어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에는 이미 노동력도 마치 상품처럼 규격화되어버린 우리의 모습에 저항하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앞으로 취업시장이라는 말은 쓰지 마." 에디터로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선배가 정해준 규칙 중에 하나였다. 취업분야를 담당하게 되어, 시도 때도 없이 ‘취업시장’이란 용어를 써야할 때마다, 습관처럼 썼다가 다시금 지우는 수고로움이 반복될 때마다, 취준생의 가치가 상품으로 전락돼버릴까 신경이 쓰였다. 말이라는 건 하다보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다시 태도가 되어버린다. 신경 쓰면 쓸수록 그 대상을 중심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요즘 10~20대는 종종 ‘추노(推奴)’한다는 표현을 쓴다. 본래는 조선시대 도망친 노비를 좇는 일을 가르켰으나, 커뮤니티 등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일이 너무 힘들어 일당을 포기하고 그대로 도망쳐 버리는 일을 의미한다.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처럼 육체적이고 단순적인 노동 형태에서 더 자주 등장하는 이 용어는 그들이 스스로의 고된 업무를 노비 생활로 비유하는 자학적인 농담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노동을 낮춰 평가할 때, 취업 시장이라는 단어는 반대로 더 견고해질 터다.      


추노 - 단기간에 그만두거나 말도 없이 사라지는 행위를 의미. 혹은 그런 행위자를 뜻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 아니라, 같이 일할 동료다. 취업시장이라는 용어는 앞으로도 많은 미디어가 사용하겠지만, 적어도 청년을 스펙화하고, 능력을 규격화하는 태도는 없어져야 할 낡은 방식이다.      


그간 취업분야를 담당하면서 취업 시장이라는 말 대신, 구직 환경이라는 단어를 써왔다. 취업은 뭔가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3인칭시점의 느낌이지만, 구직은 취준생의 입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1인칭 관점의 용어다. 시장(市場)의 넉넉하고 푸근한 분위기를 담아내는 건 단어가 아니라,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느냐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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