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면접에서 들은 말
살다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날들이 있다. 공교롭게도 나에겐 한국에서의 전 직장, 그리고 지금 미국에서 다니고 있는 회사의 최종 인터뷰 날이 그랬다. 단순히 그 회사에 들어가기 직전 마지막 관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희한하게도 두 회사 모두 최종 면접에서 드라마 같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기억은 이렇다. 그러니까 2013년 11월 어느 토요일, 평소였다면 무한도전을 본방 사수하고 있을 시간에 면접을 봐야 했던 나는 씩씩거리며 도곡동까지 갔었다. 나중에 나를 뽑은 분에 의해 알게 된 사실은 나는 그날 마지막 면접자였는데, 총 3명을 뽑는 자리에 최종 경쟁률이 10:1 이 넘었고, 내가 면접을 봤던 그 시간엔 사실상 합격자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몇 년간 여자 신입을 뽑았다가 배신(?)을 당한 나의 보스는, 내가 지원한 그 해만큼은 여자를 뽑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즉 내가 뽑힐 확률은 0에 가까웠던 셈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치 우주의 온 기운이 나를 합격시키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하필이면 '마지막'에 면접을 본 '여자'였던 내가 기적적으로 면접을 '너무 잘 보는 바람'에 합격해버린 거다. 얼마나 잘 봤냐면, 한 시간이 넘게 진행된 케이스 스터디와 압박면접에 신들린 양 대답을 하는 나의 모습에 나도 놀랐는지 일기에 '100점 만점에 90점은 줄 수 있는 면접이었다. 여기서 더 잘 볼 수가 없었다.'라고 적어놨더라. 아무튼, 최종 의사결정권자였던 나의 보스는 이미 결정된 리스트를 번복하고 나에게 표를 주었고, 나머지 두 자리를 위한 추가 면접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나는 운이 '더럽게' 좋았다.
그렇게 운이 좋았던 나였지만 미국에서 취업은 역시나 녹록지 않았다. 사회초년생이었던 한국에서의 상황과는 달리, 2021년의 나는 그저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유학 와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디자인을 하겠다며 안 되는 영어로 발버둥 치는 유학생'이었을 뿐. 코로나로 인해 상황은 참 별로 였고 나는 예민 그 자체였다. 툭 하고 치면 펑하고 터져버릴 공기 가득 찬 풍선처럼.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렇게 뾰족뾰족한 상태였음에도 이상하리만큼 '취업을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거다. 추측컨대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의 원천은 분명 '한국에서 한 번 해봤으니까'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포지션에 뽑히기까지 나는 총 4번의 인터뷰를 했고, final 면접을 본 날은 3월 중순이었다. 나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당시 다른 회사들, 그리고 지금 회사의 다른 팀들과도 인터뷰가 진행 중인데다가 모두 디자인챌린지를 받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오후 4시에 잡힌 이 인터뷰에서 내가 만날 사람은 Design Head, 즉 부서의 수장이었다. 이렇게 큰 회사랑 면접을 보는데 부서의 대빵(?)까지 만난다는 게 좀 의아하긴 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사실 난 이 인터뷰에 별로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로 아마도 이 자리는 내가 뽑히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1) 3-5년 차의 mid-senior를 찾는 자리에 내가 뽑힐 리가 없고
2) Job Description에서 가장 중요하게 요구했던 '디자인 시스템' 경험이 많지 않았으며
3) 앞서 세 차례 인터뷰를 통해 이미 다른 후보자들이 있다는 걸 들은 상태였고
4) 마지막으로 함께 진행 중이던 다른 팀의 신입 포지션이 상대적으로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최종이든 아니든 사실 떨릴 리가 만무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면접을 나머지 인터뷰를 위한 연습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의 기대도, 긴장도 없는 상태에서 인터뷰를 보기 위해 초록색 Join 버튼을 눌렀는데...
"안녕 클레어, 내 목소리 들려?"
화려한 조명 아래 커다란 액자들이 몇 개 걸려 있는 올리브색 벽지. 그 앞에 밤색 뿔테 안경을 쓴 백인 아저씨, 지금은 나의 최종 보스이자 Design VP(부사장)인 Travis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첫인상은 내가 생각했던 모습은 아니었다. 나는 아마도 근엄하고 카리스마 넘쳤던 나의 한국 전 직장에서의 보스들 이미지를 떠올렸던 것 같다. 40-50대의, 여유롭지만 냉철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리더 말이다.
그런데 이건 웬 걸, 동글동글 아저씨라니. 사실 그러면 안 되는데, 처음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어라, 마인부우 닮았네'였다. 뭐랄까, 삼겹살을 좋아할 듯한 인상? 한마디로 '귀여웠다'.
웃음을 꾹 참은 채 영혼까지 끌어올린 저세상 텐션으로 인사를 해주고 이제 여느 인터뷰처럼 자기소개를 하려나 하는 찰나, Travis가 대뜸 물었다.
"나 만나기 전에 인터뷰 3번 더했지? 어땠어? 누구 만났니?"
나는 별생각 없이 누구누구를 만났고, 무슨 얘기를 했고, 어떤 부분이 좋았다고 두리뭉실하게 답했다. 그런데 내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연이어 물었다.
"그래? 그래서 어때? 네가 기대하는 거랑 일치하는 거 같아?"
조금 당황했다. 사실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주 잠깐 '혹시 이 질문이 함정인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는데, 왜냐면 이 질문이 마치 나에겐 '디자인 경력도 별로 없는 애가 용케 여기까지 왔네? 잘할 수 있겠어?'라는 식으로 들려 괜히 찔렸기 때문이다.
수만 가지 생각이 오가다 순간의 기지를 발휘해 대답한 나의 답변은 대충 이러했다.
"사실은 처음 인터뷰 제안이 왔을 때 당황했어요. 제가 지원한 포지션이 아니었고, 경력직 자리라서요.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제 관심사랑 연결되어서 끌렸어요. 비록 디자인 시스템에 대한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제 관심사 중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거든요. 지금 인턴을 하고 있는 곳에서도 디자인 시스템을 만들고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우선 이 포지션에 어떤 역할을 기대하는지, 제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를 파악하고자 했어요."
"그래서??"
답변을 이어가길 바라는 그의 태도에 2차 당황. 하지만 생각했다. '쫄지마. 그냥 솔직하자. 어차피 내 자리도 아닐 텐데.'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 이 포지션은 단순히 디자이너의 역할만을 기대하는 자리는 아닌 것 같아요. 현재 Webex가 리브랜딩을 하면서 다른 조직들, 특히 마케팅과도 밀접하게 일한다고 들었는데요. 제 이력서에도 나와있듯이 저는 한국에서 약 6년간 마케팅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의 과거 커리어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물론 디자인 시스템 경험은 여기서 쌓아야겠죠."
사실 나는 답변을 하면서도 과연 내가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잘하는 짓인지 몰라 조심스러웠다. 물론 이력서만 봐도 내가 경력이 채 1년도 되지 않는 초짜 디자이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때로는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은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변을 하면서도 마치 프로펠러 돌아가듯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이 모든 생각을 한 순간에 멈추게 한 한마디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I've actually stalked you. (사실은 내가 너를 스토킹 했어)"
"...?? What?"
'뭔 소리야'라고 생각했다.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내가 모르는 stalk의 다른 의미가 있나? 무슨 말인가 싶어서 눈이 동그래진 나는 "Sorry, What do you mean? (그게 무슨 말이야?)"라고 물어봤다. 그러자 놀랍게도 Travis가 말하길, 우연히 Medium에서 나의 Notion Redesign을 읽었다는 거다. 그리고 내 포트폴리오와 링크드인을 찾아보았고, 나의 프로필을 Hiring Manager에게 전달하며 내가 지원하지도 않은 포지션의 인터뷰가 시작된 거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네가 내 글을 봤다고? 그리고 그걸 보고 인터뷰가 진행된 거라고? 귀로는 들리는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거다. 사실 그 케이스 스터디로 꽤 여러 군데서 인터뷰 제안이 오긴 했지만, 대부분 비자조차 해줄 수 없는 영세한 규모 거나 아예 fouding designer를 찾는 초기 스타트업들이었던 지라 진전된 곳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취업을 희망하는 분야였던 B2B SaaS, 엔터프라이즈 테크, 그것도 100명이 넘는 조직의 수장이 내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니. 이게 꿈이여, 생시여.
Travis는 내가 묻지도 않은 내 프로젝트에 대한 피드백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내가 제기했던 문제점에 공감을 했고 그걸 해결해나가는 방식, 내가 제안한 솔루션이 마음에 들었다고. 그러면서,
"앞으로 Webex는 단순히 화상회의 소프트웨어를 넘어 하나의 통합 협업 툴이 될거야. 조만간 미팅, 전화, 텔레콘퍼런스, 웨비나 모든 걸 하나의 툴에서 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리고 이 과정에서 너의 노션 프로젝트에 언급됐던 문제들이 우리 유저한테도 적용될 것이라 생각해. 또 네가 디자이너 출신이 아닌 것도 좋았어. 우리는 다양한 팀과 융화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거든. 네가 가진 장점을 가지고 우리 디자인 시스템을 scale 하는 여정에 함께해줬으면 좋겠어."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에 나는 무슨 말을 할지를 몰랐다. 그냥 놀라서 멍해있을 뿐이었다. 심장은 두근두근 거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This must be a dream, right? (이거 꿈 아니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말한다.
"No, It's not."
나머지 시간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내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Travis가 답하는, 그야말로 지원자와 면접관이 바뀐 듯한 면접이었다. 지금껏 이런 인터뷰는 없었다. 혹시 몰라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다는 나의 말에 그는 "어차피 나는 네 거 다 봤어. 그리고 나 이전에 3번이나 인터뷰 봤잖아. You've already proved yourself" 라며 더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다 대답해주겠노라 했다. 나는 정말로 성심성의껏 답을 해주는 그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이런 리더가 있는 조직이라면 정말 괜찮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호감도가 상승하고 있는데 그의 마지막 한마디로 절정을 찍었다.
"클레어, 나는 네가 꼭 우리 팀에 들어왔으면 좋겠어. 긍정적인 답변 기대할게."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진 그날, 나는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보상받았다는 생각에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쉽사리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설마 이래 놓고 또 떨어트리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에 어디다 말도 못 하고, 소심하게 친구들 몇 명에게만 '나 어쩌면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모를 것 같아'라고만 말한 채 잠이 들었다. 혹시나 아니면 어쩌지 하는 걱정과 함께.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HR로부터 합격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