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직장생활에 대한 오해와 편견
기나긴 잠수생활을 끝내고 백수 탈출 소식을 알린 나에게 지인들은 말했다. 꼭 수능 끝난 고3에게 해주는 덕담 인양. 그도 그럴 것이 취업을 하고 외노자 생활을 시작하기까지 한 달 조금 넘게 시간이 생겼다. 어차피 할 것도 없는 데다가 사실은 생활비도 다 떨어진 지 오래된 나는 빨리 시작을 하고 싶었지만, 회사에선 굳이 5월 둘째 주, 그것도 화요일에 시작을 권유했다. 알고 보니 날 배려한 게 아니라 그저 신규 입사자들의 온 보딩 교육 스케줄링을 수월하도록 하기 위한 오로지 회사 입장에서의 결정이었지만.
어찌 됐건 하루아침에 거지 백수에서 곧 돈을 벌게 되는 행복한(?) 백수로 상황이 바뀐 나는 한 달이란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그 사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회사가 위치한 산호세로 이사도 하고, 가구도 보러 다니고, 친구들도 만나고, LA도 다녀오고, 집에서 호기롭게 미드만 보기도 하고.. 얼핏 보면 수능 끝난 스무 살의 일상과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물론 일을 시작하기 전까진 말이다.
외노자의 삶이 시작된 5월부터, 지난 12월까지 나는 그야말로 일에 파묻힌 삶을 살았다. 평일은 일만 하고, 주말에도 일을 하는 삶이 계속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놀지 않았다는 건 아니고) 향수병을 핑계로 한 달간 한국에 갔을 땐 뒤바뀐 시차에서 잠을 쪼개가며 놀고 일하느라 나중엔 몸살이 2번이나 나기도 했다. 나의 삶을 정말이지, 중간이란 없는 듯하다.
“왜 그렇게 일을 해? 일이 많아?”
아는 동생이 물었을 때,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왜냐면 사실 한국인들에게 미국 회사들은 대개 한국보다 워라밸(Work&Life Balance)이 좋다는 이미지가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한국에서 미국 회사를 다니긴 했지만 가끔 본사와 연락을 해야 할 때면 세월아 네월아 하는 모습에 ‘얘네 정말 날로 먹는다’며 사람들과 흉을 보기도 했으니까. 거기다 우리 회사는 실리콘밸리 안에서도 일이 힘들지 않은 회사로 알려져 있었다. 일종의 ‘은퇴 직전 가기 좋은 회사’ 이미지랄까?
하지만 이런 이미지가 깨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이 많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리고 워라밸이 보장된다는 건 뭘까. 단순히 9시 출근, 5시 퇴근이 보장되면 워라밸이 좋은 건가? 그런데 9시부터 5시까지 하루 종일 하는 게 미팅이나 단순 노동에 불과하다면? 그 Work Life는 과연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잠시 한국에서 일했을 때를 생각해보았다. 한 직장에서만 5년 반을 다녔지만 부서도 옮기고 직무도 여러 번 바뀌었으니 나의 근무환경은 매번 달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세일즈에서 마케팅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잠시 일이 하나도 없었던 적이 있는데, 억지로 억지로 버티다 3시에 퇴근하는 말 그대로 '꿀 생활'을 한 달 이나 했음에도 당시의 나는 나의 워라밸이 좋다고 느낀 적이 없다. 반대로 이벤트 스페셜리스트라는 직책을 맡아 회사의 50주년 창립기념일을 준비했을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8시에 퇴근했지만 역시 워라밸이 나쁘다고 느낀 적은 없다.
결국 나는 워라밸이라는 것은 개인이 본인의 업(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따라 정해진다고 믿는다. 일은 그저 일이고 회사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9-5의 삶은 비교적 워라밸이 좋은 삶이겠지만, 빠르게 성장하고 싶은 사람에겐 사실 일하는 시간 자체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일하는 시간보다는 본인이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하는지가 더 중요할 테니까. 그러므로 회사가 일을 얼마나 ‘시키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워라밸은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다. 본인이 일을 더 잘하고 싶으면 더 많이 하면 되고, 그게 아니라면 그냥 주어진 일만 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율이 얼마나 보장되는 조직인가’인 것 같다. 자율이 보장되지 않는 환경, 주먹구구식으로 시키는 일만 많은 환경에선 제 아무리 일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해도 Work Life의 질 자체가 나쁘기 때문에 일하고 싶은 의욕조차 사라지게 만들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내가 생각하는 대다수의 이곳의 회사들은 워라밸의 ‘선택’이 가능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 같다. 처음 입사했을 때 누군가 나에게 ‘여긴 너 하기 나름이야. 원하면 얼마든지 많은 일을 하고 빨리 성장할 수 있고, 반대로 천천히 느리게 갈 수도 있어'라고 말해준 적이 있는데 그 말이 정확하다. 당장 우리 팀 몇 명만 봐도, 누군가는 밤에도 일을 하고 있고 주말에도 일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아이 때문에, 개인 사정 때문에 본인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일만 하는 사람도 있다. 리더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내가 관찰한 지금 부서의 수장인 Travis는 가정이 있음에도 누구보다 오래 일하고, 많이 일한다. 내 매니저도 마찬가지다. 애들만 3명 있는데 평일에 집안일 때문에 일을 못하면 주말 또는 그다음 주에 더 일 한다. ’ 미국인은 일 많이 안 해'라고 생각했던 나의 편견은 일 한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완전히 깨졌다.
따라서 ‘미국 회사는 워라밸이 좋다’는 생각은 오해다. 개인의 의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워라밸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리고 적어도 실리콘밸리에서는 이 선택이 한국보다 높은 확률로 가능한 것 같다.
그 밖에도 외노자가 되기 전에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그런데 알고 보니 편견이었던 것들이 몇 가지 있다.
회사에선 개인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
물론 우리나라처럼 이력서에 사진이나 출생 연도를 적게 하진 않지만 (불법이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질문을 안 하는 것도 아니더라. 오히려 친해지면 개인적인 얘기도 많이 한다. 단, 매우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나이는 몇 살인지, 데이트는 하는지, 주말엔 뭘 하는지, 결혼한 사람에겐 혹시 자녀 계획이 있는지 등. 한국엔 밥상머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해 대는 이 질문들은 여기선 적당히 친해진 뒤에 물어보거나, 혹은 친해지기 위해 자신이 먼저 개인적인 얘기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이런 얘기가 나와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다. 나도 일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최근에서야 팀원들이랑 나이를 깠는데(?) 의외로 다 또래들이어서 기뻤다. 물론 그들은 아시아인에 대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워해서 나의 나이를 듣고는 놀라 까무러쳤지만.
직장 동료는 비즈니스 관계
위의 오해와 일맥상통하는데, 회사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내 경험상 그렇게 비즈니스적이지도 않다. 적당히 친해지면 같이 밥도 많이 먹고, 주말에 놀기도 하고, 동료 이상으로 친구가 되기도 한다. 물론 나는 입사 직후부터 지금까지 재택근무인지라 회사 사람들을 실제로 만날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Bay Area에 사는 몇 명을 종종 만나 밥도 먹고 술도 먹고 회사 욕도 한다. 심지어 내 매니저는 내 SNS를 먼저 팔로우하기도 했다.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역시 이것도 회사마다,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미국 사람은 다 활발하다는 것
역시 오해이다. 여기 애들도 소심한 사람 많고, 발표만 하면 목소리가 덜덜 떨리는 애들도 많다. 영어가 모국어이고 여기 토박이인데도 팀 빌딩이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 워크숍 자리에서 존재감 없이 조용히 있으면서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사람들은 보면 역시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구나’라는 생각에 조금 위안을 얻는다.
대단한 편견이나 오해는 없었지만, 확실히 한국에서 일할 때와는 여러 가지 다른 점들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외노자 라이프에 적응 중이라고 믿는 지금, 하나씩 새로이 알게 되는 이런 오해들이 나는 나쁘지만은 않다. 나 역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시아인 혹은 한국인에 대한 선입견(수학을 잘하고, 조용하고, 워커홀릭이라는 점)을 열심히 깨 주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