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린 Apr 28. 2017

같은 길, 다른 마음

04

1월의 길 -


오전 8시 반. 부츠힐을 신고 황급히 집을 나섰다. 저벅저벅. 제 보폭보다 버겁게 골목을 걸었다. 분침이 35를 가리킬 즈음, 버스카드가 든 목걸이 지갑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버스 정류장이 건너편에 있었다.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갑을 열어 보았다. 현금도 없었다. 다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매서운 추위에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아까보다 더 넓은 보폭으로 걸었다.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맞은편에서 다가와 스쳐 지나갔다. 분침은 40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빙판 때문에 바닥이 미끄러워 끝까지 걸었다. 힐을 벗지 않은 채로 집에 들어가 카드 지갑을 목에 걸었다. 검은 얼룩이 바닥을 적셨다. 밖으로 나오며 버스 어플을 켰다. 20분 후 도착. 빼도 박도 못하게 지각이었다. 택시 어플을 켰다. 5분 후, 아까 그 버스정류장 맞은편에서 택시를 탔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앉아 있었던 것. 이따금씩 화장실에 간 것. 점심시간에 정직하게 6천 원짜리 백반을 먹은 것. 매일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오늘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4월의 길 -


오후 2시 반. 어영부영 아침 겸 점심을 때우고 설렁설렁 밖을 나섰다. 햇살의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그 온기를 받은 봄꽃들이 담벼락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골목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재활용품을 수거하는 트럭의 소리와 자전거 체인 소리,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아주머니의 웃음소리 같은 것들이 봄 공기와 섞여 고요한 골목을 채웠다.


대충 때운 끼니 탓에 허기가 돌았고 그제야 지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구겨진 택시 영수증 밖에 없었다. 허기를 벗 삼아 걷기로 했다. 천천히, 한 걸음씩 곱씹으며 골목골목을 누볐다. 모두 출발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어딘가를 가야겠다는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체온과 같은 온도의 바람을 맞으니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봄의 한가운데, 내가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