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여행 - 아홉
죽음이 그리 멀리 있지 않고 주위를 맴돌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누구든지 죽음 너머의 저편을 알고자 한다. 더욱이 사랑하는 사람이 돌연 그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떠났거나, 바로 당신이 이제 막 그 여행을 선택 없이 떠나야 한다면, 그 너머를 샅샅이 알고 싶어 할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죽음에 대한 연구는 놀랄 만큼 활발하다. ‘죽음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생의 참 의미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물음표를 던져 보았다.
죽음에 관하여 제대로 아는 사람은 모두 죽은 사람들뿐이니 그들로부터는 명확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 차선으로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 즉 근사(Near Death Experience;NDE) 체험자들은 어떨까? 근사 체험이란 미국 정신과 의사이자 사후생 연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레이먼드 무디 박사가 처음 사용한 용어다. 그는 1975년 출간된 베스트셀러 ‘생후생’ (life after life)에서 일시적인 죽음의 상태에서 다시 살아난 환자들의 사례 연구를 통해서 근사 체험의 지평을 열었다. 구글에서 ‘NDE’를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이제 그쪽에 관련된 분야의 자료들은 깜짝 놀랄 만큼 엄청나다.
죽음에 대한 전혀 색다른 생각의 물꼬를 터주게 한, 그래서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자세와 시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두 권의 책이 있다.
하나는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사후생’(On Life after Death)이다.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죽음 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2만 명이 넘는 근사체험자 사례들을 직접 연구하면서 죽음에 대한 일련의 흥미로운 저서들, 죽음학 연구의 고전 중 하나로 꼽히는 On Death & Dying(1969)부터 On Grief and Grieving( 2005)까지 스무 편이 넘는 저작물을 남겼다. 박사 자신도 근사체험 자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그들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었다.
"육체이탈 체험을 한 근사자들은 한결같이 다시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평화라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알아야 할 보편적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강조하는 저자의 논리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저자의 연구가 죽음을 미화한다는 반론도 끊이지 않는다. 체험자들의 증언 외에는 이렇다 할 과학적인 증빙자료가 미비하다는 지적도 많다. 그렇지만 박사처럼 '별나라로 유람 간다'며 떠날 수 있는 죽음이 부럽다. 나 개인적으론 이 책을 읽으면서 ‘죽음이란 밝고 생기발랄한 삶에 극명하게 상반되는 어둡고 침울한 암흑의 골짜기’란 막연하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조금씩 거둬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여전히 공포는 존재했지만, 확인 불가능한 미지의 세계라고 생각했던 죽음에 관한 원천적인 의문들을 하나둘씩 이해할 수 있는 신지식의 빗장을 풀어주었다. 지극히 역설적이긴 하지만 ‘죽음을 제대로 알아야 주어진 생을 제대로 살 수 있겠다’라는 어렴풋한 확신마저도 도출되었다.
책을 덮고 나면 생의 가치는 배움을 얻는 것, 즉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어려운 선택들을 하면서 배우며 또 성숙해가는 것, 특히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란 저자의 결론이 각별히 의미심장하다.
두 번째 책은 미국의 정신과 박사인 브라이언 와이스 박사가 쓴 ‘Many Masters, Many Lives (1988)’이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정신이 멍멍할 정도로 생생하다. 전생이니 환생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마치 소설처럼 펼쳐지는 이야기는 기승전결, 읽는 이의 관심을 한 번에 끌어당기는 도입부 등 흥미진진한 요소가 많았다.
저자는 정신장애를 가진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최면요법을 쓰는데, 환자의 의식은 놀랍게도 청소년기- 유아기를 거쳐 전생의 기억을 쏟아내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경이로웠던 내용은 환자가 죽음과 환생 사이에 겪은 중간층에서의 이야기다.
한 생을 끝내고 죽음을 지나면 중간층에서 머무는데 이곳에서 여러 스승들이 들려주는 일관된 메시지가 인생의 가장 커다란 목적은 '배우면서 깨닫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 배움과 깨달음의 대상은 다름 아닌 사랑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발견은 머리털을 쭈뼛 세우게 만든다. 왜냐하면 비슷한 이야기들을 초의식이나 영혼, 또는 죽음이나 환생, 근사체험을 다룬 교과서 같은 책, 즉 ‘티베트 사자의 서’나 앞서 소개한 무디 박사의 ‘생후생‘ , 로스 박사의 책에서도 이미 거론된 것이다.
진리란 과연 이런 것이 아닐까.
다른 자료와 색다른 접근을 해보지만 귀결되는 결론이 모두 동일한 것, 이런 것을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앞서도 말했지만 사후생을 믿고 안 믿고, 진짜니 가짜니 하는 소모적인 논쟁보다는 읽는 개개인이 우선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생이란 확실히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며 우리의 오감을 뛰어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에 덧칠되어 숨겨진 겹겹의 신비는 죽음이란 미지의 세계와 밀접하게 닿아있으니 ‘죽음 그 이후’에 대해서 평소에 별로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깊이 음미해볼 만한 주제임에 틀림없다.
생이 고단하고 힘든 것은 나를 나 자신의 중심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볼 때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하루살이처럼 또는 들꽃처럼 일시적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자연의 구 성분으로 자신을 녹여버리면 그것으로도 좋을 것이다. 때가 되면 변화하는 자연의 색깔, 심산유곡 속에서 소리 없이 바뀌어지는 노르스름하고 붉으스름한 단풍잎, 반짝거리는 여름바다의 은비늘 조각들, 솜처럼 푸근하게 골짜기를 덮은 눈 바다, 그리고 인간의 갈등과 불안을 비웃기라도 하듯 멋들어지게 푸르기만 한 신록 등 자연은 이리도 아름답고 곱기만 한데 그 구성요소에 불과한 인간 개개인의 생이란 왜 이리 고단하고 힘 부친 투쟁의 연속인가란 의문을 던져주었다.
그 투쟁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냥 주어졌기에 가감 없이 받아들이고 존재로서의 확인을 위하여 부단 없이 전진해야 하는가?
우선 첫 번째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너는 무엇인가?’
옛날 같으면 ‘신문 기자’라고 아무런 주저 없이 대답했을 것이다. 그 직업에 대한 자긍심도 있었고 무엇보다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선뜻 그 대답을 할 수 없다. 정열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네 삶의 근간을 이루는 정열은 무엇인가?”
내가 생을 불사르며 몰입하는 정열의 대상? 시간과 노력, 에너지를 투입하면서 즐거움과 가치를 동시에 찾을 수 있는 그런 대상? 그런 것이 내게 있기는 한가….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어처구니가 없지만 주변 조건에 상관없이 한 번도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인디영화제인 선댄스 필름 페스티벌을 시작해 세계적인 독립영화 축제로 만든 장본인은 널리 알려진 대로 할리우드 배우이자 감독인 로버트 레드포드다. 지난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가 영위해온 생의 두 가지 정열은 영화와 환경 보호다. 그건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그가 영화계에서 그리고 환경보호운동에서 보여준 수많은 노력과 업적을 통해 수없이 입증된 바 있다. 따라서 누가 그에게 ‘당신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주저 없이 ‘나는 배우이자 감독이며 환경보호 운동가입니다’라고 거침없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정열을 쏟을 수 있는 대상의 부재는 나란 존재의 의미를 쉽게 희석시켜 버린다.
그 의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내게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삶의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기차 여행의 의미가 처음부터 뚜렷하다면 폭풍우가 몰아치고 기차가 흔들려도 이를 악물고 숱한 역경들을 견뎌낼 수 있을 텐데.. 의미 자체가 불분명하니 작은 고난이 스쳐만가도 쉽게 우왕좌왕해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