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말을 지금 해야 하는 이유

기차 여행 - 열

by 강바다

서늘한 한기가 휘감긴 이른 아침의 정적을 깨고 전화벨이 요란스레 울렸다.

자신의 인생궤도를 단박에 바꿔놓는 순간을 한두 번쯤 누구나 맞게 마련이다. 내겐 이 한 통의 전화가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수술 날짜와 시간을 알리는 전화였다.

전화를 끊고 수화기를 놓으려고 하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마구 흔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맥없이 주저앉을 것 같아서 양다리를 잡고 일단 바닥에 앉았다. 하얗게 질린 내 모습에 아내도 얼굴에 핏기를 잃었다. 예상만 하고 있던 수술을 곧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니 아무런 실감도 나지 않았다.

<사진=강바다>

새벽 비행기는 을씨년스러웠다.
구름 위는 여전히 컴컴한 어둠 속이었고, 기내는 추웠다. 멀리서 붉은빛이 서서히 어둠을 걷어 내자 두툼한 솜뭉치처럼 포개진 뭉게구름들이 나타났다. 이른 새벽인데도 화사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승무원 얼굴이 기억난다. 옆자리에 앉은 대머리 남자는 출장길인지 PT 슬라이드를 들여다보여 연신 작은 노트에 메모를 했다. 작은 은테 안경과 한눈에도 고급으로 보이는 짙은 회색 양복이 잘 어울렸다. ‘세계를 누비는 성공한 비즈니스맨’은 한때 내 꿈이기도 했다.

그 꿈을 접어둔 채 이제 생사를 가르는 수술을 받기 위해 이른 새벽 이렇게 날아가고 있다.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을 쉬어보려고 억지로 눈을 붙였으나 너무 피곤한 탓인지 잠도 오지 않았다. 부스스한 행색으로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병원에 도착한 시각이 아침 7시, 수술은 오전 10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입원실에 들어서는데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한바탕의 꿈인 듯 몽롱하다.

병동에 도착하자 우선 옷을 다 벗고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채혈 후 관장을 했다. 정맥과 동맥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동맥에 주사 바늘을 꽂은 건 난생처음이었다. 난생처음 한 것이 이것뿐만은 아니었지만.

오전 9시가 되자 간호사가 들어오더니 수술이 오후 3시로 연기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이제 생각보다 떨리지 않았다. 아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기다림은 고역이다. 아내와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외면했다. 정면으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고맙다고… 아니면 미안하다고…

새벽에 못 잔 잠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잠시 눈을 붙인 것 같은데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시간을 보니 오후 2시가 넘어 있었다. 물 한 잔을 마신 후 침대 옆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리창 위에 묻은 얼룩과 창문틀에 쳐진 거미줄이 눈물 날만큼 정겹게 느껴졌다.

'아. 이런 것이로구나. 살아 있다는 것은 이런 것이야.'

<사진=강바다>

잠시 후 녹색 수술복과 수술용 모자를 두른 마취의와 간호사들 대여섯 명이 우르르 병실로 올라왔다. 마취가 어떻게 되는지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이동식 침대가 들어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수술병동으로 내려갔다. 3층이었던가. TV나 영화에서 봤음직한 수술 대기실로 옮겨졌다. 산소 탱크와 각종 의료 기기들, 여러 가지 튜브들이 벽에 달린 그런 곳 말이다. 마른침이 꼴딱 꼴딱 넘어가고 있었다. 대기실은 텅 비었고 수술 환자는 나밖에 없었다. 그제야 다시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수술대로 뉘어지자 마취의들이 다가와 “기분이 어떠냐”라고 묻길래, “이런 큰 수술은 처음인데 흥미진진하다"라고 억지로 웃으며 농담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다음 오른쪽 팔뚝에 미리 꽂아놓은 주사를 통해 마취액이 주입했다. 녹색 수술가운과 마스크를 한 마취팀과 간호사들이 옆의 수술실로 수술대를 밀기 시작했다.

“시작되는 것이냐?”라고 내가 물었다.

옆에서 수술대를 밀던 간호사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 내 손을 꼭 쥐고 옆에 서있던 아내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말없이 눈물을 주르륵 떨어뜨렸다. 그런 아내를 올려다보며 난 또다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내와 잡았던 손을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힘이 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거기까지였다. 수술실에선 기억이 없다. 수술 시작 직전, 스물에서 하나씩 거꾸로 세라고 했다. 스물, 열아홉, 열여덟… 열다섯까지도 채 세지 못했던 것 같다.

<사진=강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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