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기차 여행 - 열 하나

by 강바다

죽으면 정말 어두운 터널 속을 걷다가 터널 끝에서 광채 내는 빛덩어리를 보게 될까.

그 빛을 보면 너무 따뜻하고 아늑해서 만사를 다 잊고 그 빛 속에 안기고 싶다고 하던데.. 아니 그전에 영혼이 육신을 떠나게 되는 순간, 천장에 붕 뜬 채 자신의 육체를 내려다보게 될까. 수술대 위에서 마취에 빠진 채 누워있는 나를 둘러싼 채 여러 명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삑삑삑 빠르게 울려대는 기계음이 어느 순간 삐~이~익하고 길게 늘어져 버리면 바쁘게 손놀림 하던 의료진들이 한숨을 내쉬며 모두 손을 놓게 되는걸 천장 위에서 빤히 지켜보게 될까.
한 사람의 일생이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일순간에 눈앞에 펼쳐진다고 하는데, 대입고사 총정리 복습하듯 옛 일들을 잡히듯 생생하게 보게 될까. 저승에서 우릴 마중 나오는 사람은 이승에서 잘 아는 사람이라는데 그건 누구일까. 아니면 영화 ‘천사들의 도시’에서처럼 나의 죽음을 옆에서 기다리던 천사가 모습을 드러내며 내게 손을 내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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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가 환하다.
9월 중추절의 덧없이 푸르고 높이 떠 있는 하늘처럼 주위가 온통 푸른색이다. 가만히 보니 그건 푸른색이 아니라 빛이었다. 여러 가지 밝은 빛들이 마구 겹쳐 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평온하고 안락한 기분 때문인지 내 몸도 새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있는 듯했다. 설마 하는 생각으로 내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뾰족이 고개를 쳐들고 있는 흰 버선이 눈에 들어왔다.

‘버선이라니..’

버선을 신어 본 것이 과연 언제이던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새하얀 버선을 신고 있는 내가 신기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발을 한두 차례 마루 바닥에 짚어 보았다. 나무로 된 마루 바닥이 서서히 사라지며 어느새 난 커다란 한옥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도무지 티끌 하나 먼지 하나 있을 것 같지 않는 반들거리는 대청마루를 미끄러지듯 지나니 작은 크기의 방들이 크지 않은 마루들로 이어졌다. 집안에 들어와서 보니 이건 대저택 안에 수십 채의 크고 작은 집들이 안쪽으로 가득 포개져 있는 형태다.

이때 담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목을 빼고 돌아보니, 예닐곱 살 정도의 사내아이들 대여섯 명이 한복을 입고 복건을 쓴 채 손을 잡고 앞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오늘이 무슨 추석날인가?’

무슨 장터인 듯 상점에서 물건 파는 상투 튼 노인, 허름한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걸친 여인네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장터 너머로 초가집 지붕들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 장터의 뒷배경이 생경했다. 지붕 처마 아래 한지 위엔 굵은 붓글씨의 한문들이 써져 있다.
‘무슨 구한말도 아니고..’

그러다가 멈칫했다. 조선시대 때 양반집 사내아이들이 쓰는 복건이며, 낮은 초가집 지붕들, 상투 튼 노인, 한복 입은 아낙네들, 한지 위에 쓰인 굵은 한문 글자들이 마치 카메라로 찍은 연속 사진처럼 촤르르르 버선 신은 내 두 발 위로 지나갔다.

쩡~ 하면서 한순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커다란 한옥 내의 작은 집들은 오래돼 보이긴 했으나 하나같이 깨끗한 전통 한옥들이었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와 보는 곳인데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한쪽 마루를 지나쳐 두서너 개의 방을 지나치다가 처마 뒤로 언뜻 파란 하늘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보았던 그 밝고 푸른빛이다. 집 전체를 덮고 있는 그 빛이 도무지 예사롭지 않다. 다음 순간, 그 하늘빛을 보면서 ‘아, 여기가 천상이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천상이라.. 구한말 시대의 한옥 한가운데에서 천상의 밝은 빛을 보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은 날아갈 듯 좋다. 겁나거나 두려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은 평온했고,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불안감도 없었다.

그때 오른쪽 문지방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잔뜩 긴장했다. 한지 문이 덜커덩 열리더니 웬 노인이 마당으로 내려가고 있다. 평범한 한복 차림의 그 노인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마당을 서서히 가로질러 가고 있다. 풍채 좋은 뒷모습만 보이고 얼굴은 볼 수가 없다. 노인이 신고 있는 흰 고무신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고무신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

‘어디서 였더라..’

이때 앞으로 걸어가던 그 노인이 걸음을 늦추면서 천천히 얼굴을 돌렸다. 그 얼굴을 보자 멍한 채로 있던 내가 와락 소리쳤다.

“하… 할아버지!”

이때 영사기 필름이 ‘툭’ 하고 끊기듯 모든 게 일순 사라졌다.


몸을 도무지 꼼짝할 수가 없다. '여기가 어딘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생각이 잠시 혼란스럽게 접질려졌다. 조심스레 몸을 뒤척여 보았다. 나도 모르게 ‘끄~응’하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둠 저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까완 달리 불안감이 엄습했다. 혼란스러웠다. 자물쇠로 잠가 놓은 듯한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려 보았다. 까만 암흑보다 덜한 짙은 회색의 어둠이 면도칼로 눈꺼풀을 베듯이 스며들었다. 저편에서 누가 스멀스멀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할아버지?'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달그락 거리는 쇳소리가 계속 났다. 조심스레 뒤척여보니 몸에 온갖 줄들이 달려있다. 그제야 여기가 어딘 지 생각났다. 수술 전 집도의가 수술 후 환자의 신체가 받는 물리적인 충격은 대형 화물트럭에 치였을 때 이상의 충격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었다. 가물가물한 초록색 선위로 삐삐삐 하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중환자실 한쪽에서 의료 기기들을 정리하던 간호사가 다가와 "필요한 게 있느냐?"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와는 달리, 몸은 천근만근이다. 나를 휘감고 있던 그 푸른빛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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