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

기차 여행 - 열아홉

by 강바다
뉴질랜드의 백포도주는 넬슨 말보로 지역에서 나오는 것이 일품이다. <사진=강바다>

몇 년 전 뉴질랜드의 대표적인 백포도주 산지인 말보로 지역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뉴질랜드 예술가들과 은퇴한 노인들이 최고로 꼽는 넬슨은 말보로 지역의 중심지로 아름다운 해변가를 따라 들어가는 작은 도시다. 시내랄 것도 없이 상점들이 몇 블록 모여 있는 중심지의 가장자리에 선 캘리포니아 하우스는 자니스와 레이가 운영하는 고급 B&B다.

60세가 넘은 레이는 검은 머리에 작지만 단단한 체격으로 아무리 봐도 40대 장년의 인상이고, 50대 후반의 자니스는 영국에서 왔는데 애교 만점이다.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넬슨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은 먼저 시내 남쪽에서 젊은 배낭여행객들을 위한 저렴한 숙소를 운영하다가 반대쪽 주거지역에 고급 민박집을 열었는데 그게 바로 캘리포니아 하우스다.

두 사람은 매주 금요일 저녁, 만사를 제쳐놓고 시내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그것이 금요일을 그들만의 금요일로 특화시켜주는 의식이다. 배낭여행 숙소나 민박집이란 것이 따로 주말이 없고 오히려 더 바쁘기 때문이다. 영화 보기 전 유태인이 운영하는 카페에 들러 중동식 샌드위치인 파 라플 (falafel)로 저녁을 먹고 극장을 찾는다. 그 해 넬슨에서 마지막으로 열리는 웨어러블 아트 (Wearable Arts) 페스티벌의 티켓 예매가 문제가 생겨 졸지에 저녁시간을 공치게 된 나를 안타깝게 여긴 맘씨 좋은 주인장 부부는 선뜻 그들만의 금요일에 나를 초대했다.

낯선 도시를 배회하다가 ‘아마데우스’란 식당에서 그 근사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외로운 저녁을 계획하고 있던 나로선 재고의 여지가 없는 배려였기에 선뜻 응했다. 그날 9월의 제법 쌀랑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극장까지 걸어가 본 영화가 스필버그가 연출하고 톰 행크스가 주연한 ‘터미널’이었다. 손을 꼭 붙잡고 영화를 보고 난 두 사람은 내게 “이번 주 금요일은 네가 우리와 함께 해서 특별한 날이었다”라고 감사했다.

내가 어이없어하며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닌 바로 나”라고 했더니 레이가 기다렸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이 친구야! 자넨 아직 모르는가 본데… 기억하게.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훨씬 행복하다는 걸!” 그리곤 가볍게 윙크하면서 내 어깨를 툭 치는 것이었다.

그날 밤 며칠 후면 돌아갈 웰링턴 집에 있는 아내에게 부치는 엽서에서 “언제나 내가 아닌 남을 위해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내가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라고 썼다.

<사진=강바다>

웰링턴에 귀한 손님이 오면 레스토랑 ‘코바’로 모시고 가곤 한다.

코바는 웰링턴의 고급 주택가인 이스트본 해변가에 위치한 일류 레스토랑이다. 뒤에는 자그마한 언덕들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고, 언덕 기슭 사이사이에는 범상치 않은 모양의 주택들이 ‘아니, 어떻게 저런 곳에 집들을 지었을까?’하는 탄성이 나올 만큼 당당한 모습으로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식당 안에 앉으면 데이즈 베이(DaysBay) 앞으로 탁 트인 바다, 그 너머로 웰링턴 다운타운이 바라다보이는 경치도 그만이다. 몇 해 전 영국 윌리엄 왕자가 이곳을 들른 이후엔 한때 웰링턴 호사가들에게 손꼽히는 명소로 회자되기도 했다. 코바는 세련되고 고급 분위기를 갖춘 정통 유럽식 레스토랑이기에 웰링턴의 Boultt St. Bistro, Logan Brown과 더불어 깔끔한 손님맞이용 식사 장소론 안성맞춤이다.

2주 동안의 크리스마스와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첫날 저녁, 한국에서 오신 이모를 모시고 가족들과 함께 코바를 찾았다. 오후 7시 반이 가까웠지만 웰링턴의 여름 해는 여전히 뜨거운 햇살을 감추지 않고 있다. 바닷가엔 저녁 산책을 나온 노부부, 해변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는 아이들, 삼삼오오로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는 젊은이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파란 하늘 아래로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미소가 싱그럽고 청춘남녀가 뿜어내는 발랄함으로 생기가 넘친다. 손을 잡고 해변을 거니는 노부부의 얼굴엔 따뜻한 평화와 여유가 넘칠 듯 배어 있다. 문득 ‘이것이 바로 낙원의 모습이 아닌가’ 하여 멈칫했다. 이 광경, 이 기분, 이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었다.

이모와 식사를 함께 하는 내내, 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신바람이 나있고 아내도 모처럼만의 휴식과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한껏 들뜬 모습이다. 난 몇 번씩이나 레스토랑 창문 너머로 보이는 데이즈 베이의 저물어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낙원의 풍요로움을 만끽했다. 행복한 저녁이었다.

<사진=강바다>

2주간의 여름휴가가 쏜살같이 지나가 버린 듯싶다. 잡으려 해도 스르르 눈앞에서 흘러가 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시간이다. 휴가가 끝나려면 아직 며칠 남아 있건만 벌써부터 새해 첫 출근부터 해야 할 일이 집으로 밀려들고 있다. 의례적인 새해 인사와 함께 직원들이 휴대폰으로 연락해왔다. 집으로 일 때문에 연락 오는 것은 딱 질색이어서 휴가 전 몇 번씩 미팅을 하면서 사전 준비를 완벽하게 한다고 했는데, 급기야는 비상까지 걸려 긴급 연락망을 가동해야 하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어느 날은 사무실에 들러 팩스를 챙겨야 했고, 다른 날은 갑작스레 공항까지 나가야 했다.

휴대폰은 이미 스무 번도 더 넘게 울린 지 오래다. 그동안 외면해온 이멜을 열어보니 메일을 수신하는데만 까마득히 걸릴 듯하여 도중에 아예 노트북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새해 첫 출근하는 날 해야 할 일들을 가늠해보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와중에 가까이 지내는 롭과 질리안 부부와의 신년 저녁식사가 약속된 코바로 향했다. 금쪽같은 휴가가 이틀밖에 남지 않은 1월 첫째 주의 저녁이었다. 데이즈 베이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평화스러웠다. 저녁 해변가는 2주 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파란 하늘도, 따사로운 햇살도, 코바 뒤로 자리한 언덕 기슭의 별장식 주택들도 여전했다. 레스토랑 안 역시 하얀 테이블보로 깔끔하게 덮혀진 각 테이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와인잔과 수저 세트도, 은은하게 울리는 재즈음악도 모두 그대로다.

<사진=강바다>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진 업무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식사 내내 내 얼굴이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식사 도중 질리안이 ‘무슨 기분 나쁜 일 있었냐?”라고 물었다. 순간 난 ‘아차’하며 별 일 없다고 웃어넘겼다.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고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자고 수차례 스스로에게 다짐했건만 또다시 까맣게 잊어버리고 품고 있는 생각을 얼굴로 나타내고 만 것이었다. 후회감도 잠시, 나와 함께 식사하고 있는 아내, 롭과 질리안에게 미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부담스러운 일 생각 따윈 떨쳐 버리고 뒤늦긴 했지만 함께 한 이들과 기분 좋은 저녁을 즐기기로 했다.
레스토랑 창문 너머로 보이는 데이즈 베이의 저물어가는 저녁해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역시 낙원의 평화로움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아내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아내가 나를 돌아보고 싱긋 웃었다. 마치 ‘그것 봐. 미리 걱정할 필요 없다’며 눈으로 말하고 있다.

롭이 질리안에게 다시 말했다.
“여기 너무 근사하지 않아.”

코바에 처음 온다는 롭과 질리안이 레스토랑에 들어선 이래 번갈아가면서 서너 번도 더한 말이다. 롭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곳 정말 근사해. 해변가의 풍광도 그만이고 음식도 최고고…”

질리안이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쳤다.
“정말 그래요. 너무 근사해요. 너무 행복해요.”

롭이 질리안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당신이 행복해서 나도 행복해.”

두 사람은 가만히 눈을 마주치며 싱긋이 웃었다.


행복을 어떻게 하면 쉽게 가질 수 있는지 가까이서 보고 확인할 수 있었던, 기분 좋은 저녁이었다.

“당신이 행복해서 나도 행복해.”

난 그 말의 숨은 의미를 깨닫고 잠시 숨을 멈췄다. 롭이 행복을 느낀 건 데이즈 베이의 아름다운 저녁노을도, 코바의 맛있는 음식도, 해변가에 펼쳐진 낭만적인 낙원의 모습도 아니었다. 아내 질리안이 행복함을 느낀 것이 그를 행복하게 만든 것이었다. 과연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을 얻는 노하우가 아닐까?

행복을 느끼는 시각 자체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맞추어 보는 것이다. 나 스스로 나의 행복을 거머쥐려 하기보다 내 가족, 친구들 더 나아가 내 이웃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논리적으론 앞뒤가 맞지 않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란 장애물을 과감히 없애버리면 훨씬 단순하고 간단하게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날 저녁, 데이즈 베이의 아름다운 풍광, 평화로운 여름날 저녁, 해변가를 비추는 따사로운 해살, 멋진 레스토랑에서의 맛있는 음식, 평화와 풍요, 우정과 사랑 그리고 행복을 얻는 지혜까지 모든 것을 한껏 즐기며 감사했다. 그제야 넬슨에서 레이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