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댓말로 쓰인 블로그 글을 읽다가, 왜 저는 당연한 듯이 해라체 문장만 써왔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존댓말로 첫 문장을 써보니, 제가 독자 앞으로 성큼 다가가서 직접 말을 건네는 느낌이 드네요. 친절하고 적극적인 인상을 주려면 존댓말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붙임성이 없는 저로서는 역시 ‘그렇습니다’보다 ‘그렇다’가 익숙합니다.
그렇다면 아예 반말은 어떨까? 갑자기 말이 짧아져서 놀랐겠지? 미안. 우리나라에서 말을 놓으려면 그럴 만한 이유와 계기가 반드시 있어야 되는데 말야. ‘할머니-손자’, ‘병장-일병’처럼 누가 봐도 상하관계가 뚜렷한 경우든, ‘반모 갈까요?’라고 합의를 하든.
이번 글을 반말로 쓰는 이유와 계기는, 글쎄, 호기심 때문이라고 할까.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한 대여섯 살쯤 됐나? 진짜 갑자기 이유도 없이, 할머니한테 반말을 하고 싶은 거야. 머리 하얀 할머니한테 ‘응, 그래.’ 어쩌고 하니까 할머니가 얘 갑자기 왜 이러냐며 혼을 냈더랬지.
나는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의 언어생활이 항상 궁금했어. 연장자와 연소자, 상급자와 하급자가 똑같이 서로 이름을 부르며 ‘I, you, yes, no’를 쓰는 느낌은 어떨까? ‘넵’, ‘네네’, ‘네넵’, ‘알겠습니다’ 각각의 뉘앙스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이란? 물론 영어에도 격식을 차린 표현이 있겠지만 우리처럼 모든 문장에 전면적인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잖아.
오래전 임고생 시절에 공부했던 문법 교과서를 다시 꺼내봤어. 하십시오체, 하오체, 하게체, 해라체, 해요체, 해체. 다시 봐도 참 복잡미묘하다.
한국어 문장을 쓰려면 반드시 나와 상대방의 상하관계를 살펴서 높일지 낮출지 결정하고, 상대높임법에 따른 종결어미를 붙여야만 해. 말줄임표나 명사 등으로 문장을 끝내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지. 얼마 전 유재석의 2020년 백상예술대상 수상소감이 다시 화제가 됐잖아. 그야말로 우리나라라서 가능한 농담이었지.
“특히 전도연 씨는 저와 대학교 91학번 동기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뵙는 거 같아요.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도연아, 너무 오랜만이다’라고 했더니 ‘저도요’라고 해서 제가 좀...(웃음) 도연 씨에게 ‘도연 씨 우리 말 놨었어요’ 그 얘기를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유머로 승화됐지만, 우리말의 철저하고 복잡한 높임법 체계가 불평등한 위계질서를 강화하는 듯해서 그동안 내심 불만이었어. 종결어미의 차이뿐만이 아니라 ‘호칭’ 문제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산이 있잖아. 한 살만 많아도 ‘언니, 선배’ 등으로 불러야 하고, 직장에선 직급대로만 불러야 하고 뭐 그런 거. 특히 불편한 건 ‘you’에 해당하는 적당한 높임말이 없는 거야. 상대방을 부를 때마다 계속 ‘영희 씨는’, ‘선생님은’, ‘부장님은’, ‘할머니는’ 식으로 반복해야 하니, 참 번거롭잖아? ‘커피 나오셨습니다’ 논란을 불러온 주체높임 선어말어미 ‘-(으)시-’ 문제도 만만치 않지. 압존법까지는 말을 말자.ㅋ
높임법의 제약이 답답해서였는지,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반말 문화를 만들거나 아예 새로운 호칭, 새로운 종결어미를 만들기도 하더라고. 지금 이렇게 반말을 써보니 확실히 쓰기가 편하고, 불특정다수의 독자가 아닌 친구한테 말하는 느낌이 드네. 편하고 친근한 건 좋은데 선을 넘기도 쉬워지지 않을까 싶기도 해. 하긴, 요즘 악플이 늘어나는 이유가 꼭 인터넷 반말 문화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일상대화나 인터넷 소통은 그렇다 치고, 글을 쓸 때는 어떨까? 대부분의 책들은 해라체로 쓰여 있어. 문장마다 존댓말을 쓰자니 번거롭고, 독자한테 ‘이랬어 저랬어’라며 반말하기도 뭐하고, 그냥 ‘-다’로 끝내는 게 가장 간결하고 객관적인 느낌을 줘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러다보니 흥미로운 현상도 생겨. 나 혼자 ‘인터뷰 기사체’라고 부르는 문체인데, 신문이나 잡지에서 인터뷰이의 높임 표현을 삭제하고 해라체로 바꾸는 거야. 앞에서 인용한 수상소감을 인터뷰 기사체로 바꾸면 이렇게 돼.
앞서 유재석은 2020년 제56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TV 부문 남자 예능상을 받은 뒤 ...“특히 전도연씨는 저와 대학 동기다. 자주 볼 수가 없어서 반가운 마음에 ‘도연아 너무 오랜만이다’라고 했더니 (전도연이) ‘저도요’라고 하더라. 도연씨, 우리 예전에 말 놨었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고 소감을 밝혀 웃음을 자아낸 바 있다.(머니투데이)
나는 이런 문체가 은근히 재밌더라. 농담을 되게 건조하고 진지하게 하는 느낌이랄까? 무표정하고 말의 높낮이도 없는데 이상하게 웃긴 교수님을 보는 것 같달까. 인터뷰 형식을 활용해서 짧은 소설을 써본 적도 있지.
그렇다면 소설은? 소설 전체를 편지글 형식으로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지문은 해라체로 통일하고 대화는 인물의 말투를 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일 거야. 대화를 쓸 때도 인물들의 관계를 따져서 높임 표현을 결정해야 돼. 서로 존대하던 두 사람이 아무 계기도 없이 말을 놓는다면 독자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얼마 전 재밌게 읽은 소설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설재인, 밝은세상)에 이런 장면이 나와.
“저, 엄마한테 말 한마디 안 걸고 다시 여기로 달려왔어요, 은빈 님. 그냥, 어... 알아달라고요. 내가 진짜 진지하다, 라는 마음. 알아달라고 말하는 거예요.”
“의심한 적 없어요. 생각보다도 훨씬 빨리 왔는데요.”
은빈이 환하게 웃었다. 엄마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내 모든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친구의 웃음. 십여 년 만에 보는 은빈의 표정이었다.
“저 잘했죠?”
“네.”
“그럼 우리 말 놓아요.”
주인공 둘이 친구답게 대화하기 위해서는 ‘우리 말 놓아요’라는 언급이 반드시 필요했던 거야. 뭔가 좀 짠하달까. 외국 소설가라면 고민할 필요 없는 문제였겠지. 이 소설을 영어로 번역한다면 저 부분을 뭐라고 써야 할까? 말 놓기 전과 후의 말투 차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복잡한 높임법 체계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글을 쓰기 위해 다들 여러모로 고군분투하는 것 같아. 그 덕분에 한국어 문체와 어감이 다양해진 면도 있겠지. 「토지」를 모국어로 읽고, 그 많은 대화의 뉘앙스를 체감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아무래도, 앞으로는 우리말이 좀 더 수평적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