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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Feb 19. 2023

그땐 미처 몰랐던 첫 문장 글쓰기의 재미

2018년 독립출판 행사에 나갔을 때, ‘우연한 첫 문장’이라는 이벤트를 해본 적이 있다. 12개의 첫 문장을 만들어서 쪽지 한 장에 한 문장씩 인쇄하고, 글자가 보이지 않게 돌돌 말아서 랜덤으로 뽑아가게 한 것이었다. 다른 제작자들의 폼 나는 굿즈들과는 달리 B5용지를 잘라 끈으로 묶었을 뿐이지만 의외로 인기가 괜찮았다. 지금 내 브런치 프로필이미지가 바로 그 첫 문장 두루마리들이다.


그 당시 한 분이 “이거 써서 인스타 같은 데 올리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뜻밖의 질문에 뜨끔 하고 놀랐다. 내 계획은 나눠주는 데서 끝이었던 것이다. ‘가져간 분들이 재밌게 써보면 좋겠다, 안 쓰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래도 뭐 어때’ 정도의 생각이었달까? 그 첫 문장들로 실제 내 글을 써보지도 않았다. 아이디어만 내놓고 마무리가 안 된다는 게 바로 이런 거였나.


그땐 미처 몰랐던 첫 문장 글쓰기의 재미를 요즘 들어 실감하고 있다. 노파 작가님의 글쓰기 모임을 통해서다. 다른 누군가가 글감을 정해준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였나! 그것도 백일장 주제 같은 단어 형태가 아니라 구체적인 한 문장이라서 더 흥미롭다. 쓰면서 재밌었던 글들을 몇 편 올려볼까 한다.    

 



오늘 좀 이상한 일이 있었어.

▶ 월요일 오전 6시, 처음으로 받은 첫 문장이었다. 그날 하루종일 ‘오늘 뭐 이상한 일 안 생기나’ 하며 회사를 가고 일을 하고 밥을 먹었다. 따분한 일은 많았지만 이상한 일은 찾아볼 수 없었다. 회사 컴퓨터로 직원 전체회의 생중계를 시청하다가 결심했다. 그래! 픽션으로 가자!

오늘 좀 이상한 일이 있었어. 직원 전체회의 중에 사장이 또 기나긴 잔소리를 하고 있는데, 황 부장이 사회자 마이크를 낚아채더니 ‘그만 떠들고 노래나 한 곡 하시죠!’ 이러는 거야. 다들 벙쪄서 ‘저 사람이 미쳤나?’ 하고 쳐다봤는데, 사장이 진짜로 노래를 부르는 거 아니겠어?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사장이 노래를 하니까 다들 장단 맞춰 손뼉을 치기 시작했어. 사장은 음치였지만 확실히 잔소리보단 듣기 좋았어. 웃기기라도 했으니까. 그렇게 노래를 끝내고는 허허 웃으면서 강당을 나가더라. 어쩌면 본인도 잔소리보단 노래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황 부장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신기하단 말이지.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을 석 장 본 적이 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의 첫 문장이었다. 쉽지 않았다. 현대 한국인이 독백으로 ‘그 사나이의 사진’이라며 떠올릴 일이 있을까? ...내 적성은 아니지만, '사나이'라는 단어를 살리려면 시대극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1950~60년대 사회상을 검색하며 겨우 썼다.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을 석 장 본 적이 있다. 해방 전 경성제대를 졸업했다는 방직공장 셋째 아들로, 곱게 자란 도련님치고는 제법 다부진 데가 있는 외양이었다. 양복씩이나 빼입은 사진은 거무튀튀한 얼굴에 옷이 꽉 끼어, 영 어색한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댁도 억지로 찍은 사진이겠구려. 중매쟁이 앞에 억지로 앉은 나처럼 말이오. “난 생각 없습니다. 더 어울리는 여성이 있겠지요.” 단호한 내 한마디에 어머니가 어찌나 오래 푸념을 했던지.

그 사나이가 육이오 동란 중에 죽었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십수 년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다. 조카의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만난 중매쟁이에게 소식을 들은 것이다. 사진 속의 젊은 모습이 기억에 되살아나며,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쓰고 나서는 그럭저럭 맘에 들었는데 다시 보니 왠지 다 어디서 본 문장, 어디서 본 구성 같은 느낌이 든다... 에라이ㅋ




그래, 이 맛이야.

▶ <신의 물방울>이나 <요리왕 비룡>까지는 아니라도 뭔가 화려한 맛 표현을 해보고 싶었으나 ‘지금까지 난 대체 뭐 먹고 살았나’라며 내 식습관을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내 미각은 왜 이리 맵고 짜고 원색적인 맛만 좋아한단 말인가? 금요일 퇴근 후에 먹는 옛날통닭? 친구들과 먹은 소고기 숯불구이? 주말에 끓여 먹는 짜파게티? 몇 가지를 고민하다 나만의 힐링타임 토요일 브런치로 결정했다.

토요일 오전, 편한 옷을 대충 꿰어 입고 단골 카페에 간다. 통유리창에 붙은 바테이블 맨 구석자리에 가방과 겉옷부터 내려놓고, 카운터에서 늘 같은 메뉴를 주문한다. 냅킨과 포크, 나이프, 물컵을 가져와 테이블에 가지런히 차려놓고 이북리더기를 꺼내 책을 읽기 시작한다.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먼저 나오면 빨대로 얼음을 천천히 저으며 짤그랑짤그랑 맑은 소리를 듣는다. 뒤이어, 거의 20주째 매주 한 번씩 먹고 있는 오픈샌드위치가 나온다. 심호흡을 하며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견과류가 듬뿍 든 바질페스토와 짭조름한 하몽과 달콤한 멜론과 신선한 새싹채소와 고소한 호밀빵이 골고루 한 입에 들어가도록 신중하게 한 조각을 썰어 입에 넣는다. 그래, 이 맛이야. 휴식의 맛. 느긋하고 홀가분한 내 시간의 맛. 정신없이 일하며 보낸 닷새를 털어버리고 휴일을 맞이하는 자유의 맛. 아주 천천히 접시를 비우는 동안 내 머릿속은 차분하게 가라앉고, 여유로운 나만의 주말이 시작된다.




두드러진 개인성을 가진 여자들은 대개 마녀로 취급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 정말 어려웠다. 이 문장에 어울릴 진지하고 인문학적인 글을 짧게라도 써낼 자신이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중, 그날 점심시간에 직장상사들이 풀어놓은 무시무시한 시집살이 썰이 생각났다. 그래... 저 지적인 첫 문장은 교수의 목소리로 처리하고, 아직도 남아 있는 현실의 벽을, 도저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어느 한 사람을 그려볼까?

“두드러진 개인성을 가진 여자들은 대개 마녀로 취급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마녀 박해의 역사는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손녀딸이 노트북으로 시청하고 있는 온라인강의 속 교수의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들으란 듯이 크게 틀어놓은 걸 보니 내게 시위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지 에미 시집살이 좀 시켰기로서니, 계집애가 겁도 없이 그 꼴로 다닌다고 잔소리 좀 했기로서니, 감히 나한테 반항을 해? 대놓고 대드는 것도 아니고 남의 목소리나 빌어서, 한심하고 철없는 것. 내가 우리 시부모, 우리 영감한테 당한 얘기를 하면 책 한 권도 모자라. 그래도 난 불평 한마디 입밖에 낸 적 없다. 아니, 요즘 세상이 좀 좋아? 여자도 대학 다니고, 저렇게 교수도 되고, 아주 저 잘난 맛에 잘들 살더만.

...이런 나를 손녀딸은 무슨 구한말 귀신 취급한다. 흥, 맘대로 생각하라지. 귀신 다 되어가는 거 맞지 뭐. 난 평생을 이렇게 살면서 산전수전 다 겪었는데 지까짓 게 어쩔 것이냐? 난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란다.

▶ 어이쿠... 감사하게도 이 글이 이번 주 베스트 글로 뽑혔다. 작가님께서 정성 가득한 첨삭을 해주셔서 도움이 많이 되었다.

1. 3인칭 시점으로 바꿔 생동감을 더하기

2. 할머니의 심리를 좀 더 복합적으로 표현해보기

3. 현실 반영에만 머무르기보다는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변화할 계기를 만들거나, 할머니가 며느리 시절에는 피해자로서 고초를 겪다가 위치가 바뀌니 권력을 휘두르려는 모습을 통해 인간 본성을 성찰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확장해보기




너는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해.

너희는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해. 너희를 모두 모아 집을 짓는다면, 그 집은 아마도 해변에 있을 거야. 그 안에는 바다가 보이는 창문들이 있고, 널찍한 책상에 꽃병 하나가 놓인 내 작업실이 있고, 작업실 밖에는 한 벽 가득 책들이 꽂혀 있고, 다른 벽에는 사진과 그림을 여러 장 붙여 놓았겠지. 가족사진이며, 내가 사랑했던 공원과 여행지들의 사진, 전시회에서 산 기념 엽서, 귀여운 펭수 사진 등등. 누워서 뒹굴거리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침대도 있고, 욕실에는 욕조도 있을 거야. 한 층 위에는 옥상이 있겠지. 옥상에서는 빨래가 햇볕을 받아 바짝바짝 마르고, 나는 가끔 평상에 드러누워 하늘을 볼 거야. 그리고 생각하지. 아, 이제 곧 봄이 오겠구나. 최고로 설레는 순간이야.

▶ 써서 올리고 나서야 피아노를 빼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읽어보니 인테리어를 좀 바꾸고 싶은 부분도 있긴 하다. 하지만 살고 싶은 집의 청사진은 앞으로도 계속 바뀔 테니, ‘최종_최최종_진짜최종_진짜레알최종’ 설계도를 확정하기는 어차피 불가능하겠지.




이렇게 내일 아침에도 새로운 첫 문장을 받게 될 것이다. 아침 6시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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