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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Apr 01. 2023

앞으로 그림과 어떤 관계로 지내게 될지

글쓰기가 아니라도 뭔가 딴짓에 확 꽂힐 때는 꽂힌 대로 흘러가보는 것도 괜찮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취미들이 반짝하고 사라지지만, 몇몇은 살아남아 내 인생을 조금 더 재밌고 자유롭게 해주니까. 나를 표현할 도구가 하나 더 생긴다는 건 멋진 일이다. 그러려면 의욕이 폭발하는 초기에 최대한 불태워서 한 단계를 넘어서보는 게 좋다.

 

길드로잉 시작 일주일 전, 나뭇가지 하나를 골라 최대한 똑같이 그려봄.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했지만 뿌듯


지난주 토요일, '이다의 길드로잉' 첫 수업을 들으러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 갔다. 그림 수업이라는 건 고등학교 미술시간 이후로 처음이었다. 드로잉북과 마카 몇 자루, 붓펜 등 최소한의 준비물을 챙겨 신촌으로 향했다. 5층 카페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을 샀다. 토요일 아침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드로잉 수업이라니! 뭔가 내 자신이 멋지게 느껴졌다...ㅋㅋㅋ


첫 과제로 그린 '오늘 입은 옷&가방 속 물건'


강의실에 들어서니 길게 붙여 놓은 책상에 가지각색 그림도구가 잔뜩 놓여 있었다. 저걸 다 써볼 수 있다니, 대박, 신난다! 라고 생각했지만 낯가림 심한 현실의 나는 이다 작가님에게 수줍게 인사를 한 뒤 맨 뒷자리에 앉았다.


첫날 체험해본 갖가지 그림도구들


수업 내용은 [끄적끄적 길드로잉] 책을 기본으로 했는데, 더 많은 예시 그림과 함께 육성으로 들으며 실제 도구들까지 사용해보니 더 생생하게 와닿았다.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그림을 그리는 마음자세에 대한 얘기였다.


그림 그리기는 인간의 타고난 본능이므로 모든 사람은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내 손을 따라 마음대로 그리면 된다. 실패해도 경험치가 쌓인다. 완벽한 1장보다는 어설픈 10장을 그리자. 무조건 많이 그리되, 그리고 싶을 때만 그리면 된다. 잘 그린다/못 그린다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나 자신부터 내 그림을 좋아해주자. 이 클래스에서는 ‘자학과 필요 이상의 겸손’을 금지하겠다. 앞으로 나는 여러분의 그림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장점을 찾고 격려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자학과 지나친 겸손 금지'라니! 뜨끔하면서도 완전 공감되는 규칙이었다. 그 후로 자학과 겸손의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와도 참아보고 있다.ㅎ




이하 상당한 스크롤압박 주의. 그림 한두 장에 글 한 편씩 깔끔하게 엮어 브런치에 올렸다면 좋았겠지만 최근 2주 동안 너무 많이 그려버렸다. 어쩌면 의외로 나는 브런치가 아니라 인스타를 했어야 하는 사람일까?(라고 뒤늦게 생각해보는 브런치 9년차ㅋ)


첫 수업이 끝나고 모처럼 연극을 보러 대학로에 갔다. 남는 시간에 낙산공원에 올라갔는데 길을 잘못 들어 엄청난 급경사 길을 기어올라가야 했다. 벤치에서 한숨 돌리며 그려본 그림. 겨울나무를 표현하겠답시고 가지를 잔뜩 그려넣고 갈색으로 발라버렸더니 나무가 뇌 같은 모양이 되어버렸다ㅎ


뇌 같은 나무들 2. 건물과 풍경은 웬만큼 따라 그렸는데 춤연습 하는 학생들을 그리려는 순간 붓끝에 버퍼링이 걸렸다. 결국 소심하게 그려넣은 졸라맨 다섯.


내겐 너무 어려운 인체. 인체 그리기 책이나 유튜브가 많지만 난 뼈와 근육까지 살린 정확한 그림을 그리려는 게 아니라고요! 그냥 적당히 사람처럼 보이는 단순한 캐릭터를 그리고 싶을 뿐인데... 수많은 자세와 표정이 단순한 형태로 실린 표본, [월리를 찾아라!]를 펼쳐놓고 끄적여보았다. 내가 그리고 싶은 자세 찾기가 월리 찾기 못지않게 어려웠다.


두 번째 과제로 자화상을 그렸다. 평소 찍어놓은 셀카도 없고, 자기 전에 새삼 옷 갈아입고 꾸미기도 귀찮아서 내추럴한 모습 그대로 거울을 보며 그려버렸다. 수강생 밴드에 그림을 업로드하니 커다란 얼굴이 뙇!!! 하고 사진첩에 박혀 시선강탈이 심했다-_- 처음으로 자화상을 그려보니, 맘에 안 들던 내 외모도 하나의 '캐릭터'로서는 충분하지 않나 싶었다. 이 캐릭터를 단순한 형태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그리는 게 좋을지 여러모로 실험해봤다.


아직 긴가민가 하지만 이런저런 얼굴 형태를 써서 그림일기를 그려봤다. 그런데... 커다란 눈 커다란 코 쌍꺼풀을 다 살리려니 정면 눈땡글 말고 다른 표정을 그릴 수가 없다 ㅋㅋㅋㅋ 역시 그냥 '^^' 식으로 간단히 그리는 게 나을지 고민중.


3가지 색 마카와 붓펜만 가지고 나가서 그림을 그려봤다. 색 조화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벚나무 색이나 화사한 봄 느낌이 안 살아서 아쉽.


분노의 나무 그리기 연습. 그래도 점점 정돈되어 가는 것 같다. 구름처럼 구불구불 테두리 선을 그리고 줄기를 찍찍 그으면 대충 나무 같아 보인다 ㅋㅋ


두 번째 수업이었던 오늘은 한 시간쯤 나가서 각자 그리는 시간을 가졌다. '호텔 고구~마'라는 이름을 보니 안 그릴 수가 없었다 ㅋㅋㅋㅋㅋ 그리고 타워크레인이 원래 저렇게 쨍하니 예쁜 노란색이었나? 역광에다 크레인이 너무 높아서 사진은 망했지만(심지어 손가락으로 가림-_-) 그림은 내가 좋아하는 노랑을 실컷 쓸 수 있어서 좋았다. 고구~마 호텔은 곧 없어진다고 한다.


만년필로 신촌 홍익문고 쪽 거리를 그려봤다. 처음엔 홍익문고와 통유리 빌딩만 그렸더니 뭔가 허전했는데, 작가님의 일대일 멘토링에 따라 오른쪽 여백에 공사장을 채우니 나아진 듯하다. 도로에 분홍색 차선이 있어서 저게 뭔가 싶었는데 검색해보니 주행유도선이란다. 덕분에 벚나무와 차선을 분홍으로 깔맞춤할 수 있었다. 통유리 빌딩에 비친 건물 그림자를 표현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용기를 내어 회색으로 죽죽 그어보니 은근 그럴싸하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의외로 익숙하게 선을 긋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지? 내가 그동안 그림을 꽤 그려왔었나...? 연예인 덕질을 할 때 얼굴을 따라 그리고, 지겨운 회의를 들을 때 낙서를 하고, 브런치에 쓸 얘기 없으면 그림 그리고,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연습이 된 걸까?


오다가다 인사나 하면서 지내던 초등학교 동창이 갑자기 주요 등장인물로 전면에 나선 느낌이다. 앞으로 내가 그림과 어떤 관계로 지내게 될지 궁금해진다.




<2주간의 '그나마 건강식'>

1. 빡신 야근 후 분노의 야식으로 매운새우깡을 샀지만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 샐러리를 곁들임

2. 동글동글 웰빙아침

3. 초간편 저녁메뉴


4. 평생 궁금해하기만 했던 탕후루를 처음으로 먹어봄. 코팅시럽이 생각보다 두꺼워 와드득 깨물어 먹음. 왠지 어릴 적 보석반지사탕이 떠오르는 맛. 생과일이 들어 있으니 건강식(?)에 끼워넣어봄 ㅋㅋㅋㅋ

5. 변함없이 내게 힐링을 선사하는 단골카페 브런치

6. 애호박에 기름&소금을 발라 에어프라이어에 구워봄. 끓인 호박은 절대 안 먹는데 구운 호박은 먹을 만했다. 애호박에서 은은한 단호박 맛이 나는 느낌...?


7. 치킨이 아닌 배추와 밥으로도 맥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제로맥주지만 ㅋ

8. 막회와 쌈채소를 시도해보았다. 음... 회가 좀 퍽퍽해서 다시 사 먹진 않을 것 같지만 한 끼쯤 사치스럽게 웰빙해본 걸로 만족.

9. 채소와 빵과 계란. 나름 아침메뉴의 정석 아닐지.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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