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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집개구리 Aug 10. 2016

그녀의 '덫' #35

무의식의 공간에서

며칠 후, 하나가 간단하게 짐을 챙겨 본가로 내려갔다.

떠나기 전,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내가 힘든 건, 이런 일을 겪어서가 아니야. 그런 사람을...... 말도 안 되는 그런 남자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날 견딜 수 없게 해. 넌, 나처럼 후회는 안 했으면 좋겠어. 정말 네가 원하는 게 뭔지 그걸 찾았으면 해."


그렇게, '갈게' 한마디를 남기고, 손을 흔들며 떠났다.

이 좁은 원룸이 오늘따라 유난히 휑하게 커 보이는 건 내 마음이 허전해서일까?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까 생각도 했지만, 딱히 이 겨울에 움직이기도 어려울 것 같아, 몇 달 남지 않은 계약기간을 채우기로 했다. 봄이 오면 나아지겠지. 조금씩 좋아지겠지.


하나가 비운 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요가 강사를 구하는 동안에, 당분간 저녁 타임을 맡기로 했다.

새벽과 저녁, 중간에 뜨는 시간 동안은 주로 무경을 찾아가 함께 했다.


어제 마트에서 장을 봤는데, 무경에게 줄 죽을 만들었다. 병원에서 식사가 나오긴 하지만, 무경은 전에 그가 아팠을 때 내가 끓여주었던 죽이 먹고 싶다고 했다. 정말 생각난다며.......







병실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경은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간이 테이블 위에 노트북이 올려져 있고, 뭔가에 집중하고 있다.


"자기야, 나 왔어."


그가 날 보더니 황급히 뿔테 안경을 벗는다. 난 그 모습에 웃으며 다가가


"왜 벗어? 난 좋은데, 똑똑해 보여서. 착한 범생이 같아."


그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정말? 어쩐지 거꾸로 들리는데, 띨해보인다는 건가? 요새 자꾸 눈이 침침해."


침대에 걸터앉아 안경을 씌어주며


"난 자기 그런 모습이 좋아. 뭔가 나사 풀린 모습? 인간적이잖아. 근데 뭐 하고 있었어?"


그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노트북을 가리킨다.


"전에 얘기했던 거. 다시 글 쓰고 있다고. 작업 중이었어."

"무리하면 안 되는 거 아냐?"


그가 고개를 저으며


"답답해서 죽을 것 같은데, 그나마 작업할 수 있어서 버티는 거야. 아니면 벌써 도망갔을 걸?"

"승주씨도 알아?"

"응, 며칠 전에 얘기했어."

"그럼 됐어."


그가 빤히 날 쳐다보며


"전에는 승주 얘기하면 펄쩍 뛰더니, 요샌 안 그러네. 뭐야, 벌써 친해진 거야? 둘이 같이 내 욕 하는 거 아냐?"

"비밀~"

"치사해."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삐진 그가 귀엽고, 사랑스러워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잡으며,


"내가 애도 아닌데, 설마 벌써 끝난 건 아니지?"


지그시 내 눈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죽 끓여왔어. 죽 먹어."

"나 지금 죽 안 먹고 싶은데? 다른 건 안돼?"


그의 말에 난, 두근거림을 감추며 그를 밀어냈다.


"자꾸 이러면, 승주씨한테 이른다?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은 안돼. 꿈도 꾸지 마."


그가 실망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팔을 놓아주자, 난 가방에서 죽통을 꺼내어 천천히 그릇에 따라 부었다.


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는 그. 숟가락을 들어 죽을 먹더니 날 쳐다보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다.


"정말 맛있어. 행복해."


다행이다. 그의 웃는 모습을 보면 나 역시 행복해진다. 내가 원하는 건, 이렇게 그의 웃는 모습을 보며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






무경이 죽을 먹는 동안에, 하나가 본가로 내려간 얘기를 짤막하게 해주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동안 날 쳐다보던 그.

한참을 대화를 나누다가 승주와 약속한 시간에 맞춰 병실을 나왔다.


"무경이 보고 왔어요?"

"네."


진료실에서 날 기다리던 승주가 인사 대신 물었다.


"괜찮겠어요? 보통 준비를 하고, 최면요법을 쓰는데, 힘들 수도 있어요. 사람에 따라서 구토나 발열, 현기증 외에도 신체에 영향을 줄 수 있고요."

"해볼게요."


담담하게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승주가 진료실 안의 공간으로 데려갔고, 긴 의자에 앉혔다.


"깨어나기까지 삼십 분 정도 걸릴 거예요. 처음이라 시간이 더 필요할 수도 있고, 그럼 시작해 볼까요?"


그녀가 맞은편에 앉아 CD플레이어를 작동시켰다.

마치 요가를 할 때 듣던 음악처럼, 금세 편안한 분위기가 실내를 감돌았다.


"이제 눈을 감고 마음의 점을 향해 집중하겠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다른 생각들이 머물고 있다면 모두 비워주세요."


그녀의 말에 몰입을 시도했는데, 평소에도 명상을 자주 해서인지, 분위기에 바로 적응이 되었고, 몸의 근육들이 이완이 되어 편해졌다.


조용한 피아노곡을 따라 물 흐르듯 울리는 건반 소리에 몸을 맡겼다.

점점 음악소리가 작아지며, 승주가 천천히 암시를 준다.


"당신은 지금, 최면 상태로 들어갑니다. 이제부터 내가 묻는 질문에 보고 듣는 것을 말해주세요. 만약, 떠오르지 않고, 당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팔을 들어 신호를 보냅니다. 최면 상태에서도 의식이 있기 때문에 당신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말이 들린다면, 오른팔을 올리세요."


그녀의 목소리에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점을 쫓아 따라가니 빛이 반짝이며 어떤 공간으로 들어섰다. 마치 작은 상자처럼 온 벽이 회색으로 둘러싸인 이 공간이 낯설었다.


한쪽 벽에는 연필로 그린듯한 사각형의 그림이 있고, 그 앞에 네 개의 상자가 놓여있다.


"이제, 보이는 것을 말해주세요. 당신 앞에 무엇이 있습니까?"


난 그녀의 질문에 따라 그대로 얘기해주었고, 잠시  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립니다. 당신의 무의식에서 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당신은 열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준비가 되면 문을 열어봅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승주의 목소리에 몰입을 하니, 다시 섬광의 빛이 반짝였고, 사각형의 그림에 손잡이와 함께 열쇠 구멍이 생겼다. 난  망설이며 상자를 열어보았는데, 그 안에는 작은 열쇠가 들어있었다.


문을 여니, 그 밖에는 또 다른 공간이 펼쳐졌는데, 자세히 보니 무용연습실이었다. 5살 때 엄마 앞에서 신나게 춤을 추던 나. 그리고, 엄마 손을 잡고 동네에 새로 생긴 무용 연습실에 찾아가는 나의 모습.


상냥하던 선생님과 처음 토슈즈를 신고 자세를 잡는 날, 바라보던 엄마의 흐뭇한 미소.


엄마가 웃는 모습이 좋았다. 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내가 춤추고 있을 때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 역시 행복했다.


한 손에 토슈즈를 담은 작은 가방을 들고, 한 손에는 엄마가 사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시 문을 열고 있었던 곳으로 돌아옵니다. 하나, 둘, 셋"


아쉬운 마음에 엄마에게 손을 흔들자, 반짝이는 빛줄기와 함께 난 다시 회색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가장 슬펐던 기억을 떠올려봅니다. 준비가 되면 다시 문을 열어봅니다."


슬펐던 기억.

입술을 움직여 다시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다시 내 앞에 문이 생겼고, 난 두 번째 상자에서 열쇠를 꺼내어 그 문을 열었다.


또 다른 공간이 눈 앞에 펼쳐졌고, 난 그곳으로 발을 내디뎠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현관문이 열려있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니, 안방에서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려다가 갑자기 안에서 언성이 높아져 멈추었는데, 엄마와 아빠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나도 이제 지쳤어.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하는데? 벌써 은행 빚이 산더민데, 또 돈을 빌려오라고?"

"그럼 어떡해요 이제 와서. 저번 달에 레슨비도 못 줘서 겨우 버텼는데, 애가 자꾸 힘들어하잖아. 우리가 다른 호사는 못 누려도 예랑이 하나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키우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솔직히 무용을 해서 취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경기가 안 좋아서 점점 더 먹고 살기 힘들어질 텐데 지금이라도 그만두게 하는 게 예랑이를 위하는 걸 수 있어. 왜 그런 생각은 안 해?"

 "애가 좋아하잖아. 당신 힘든 거 아는데, 조금만 우리 견뎌봐요. 내가 다음 달부터 식당 나가기로 했어. 최소한 대학은 보내줘야지."

"내가 애 잘못되라고 이러는 거 아니잖아. 처음부터 형편도 안되는데 왜 무용은 시켜가지고,  지금까지 예술고 학비에 레슨비에 해달라는 데로 해줬다고. 그런데 나도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순 없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나 정리해고 대상자에 올랐어. 내년부터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예랑 아빠, 내가 일을 더 할게. 식당도 나가고, 다른 일도 찾아보고, 그러니까 예랑이 대학은 보내줘요. 응?"


그렇게 두 분의 대화는 끝이 났고, 난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는 5살 때 엄마가 사주셨던 첫 토슈즈가 놓여있었는데, 오래되고 낡았지만 소중히 간직한 것이었다.

천천히 토슈즈를 들어 올려 가슴에 품었다.


잠시 후, 난 토슈즈를 들고 방에서 나와 휴지통 안에 버렸는데, 자꾸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력감. 나 자신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그 날, 처음으로 느꼈던 것 같다.






"다시 문을 열고 있었던 곳으로 돌아옵니다. 하나, 둘, 셋"


승주의 목소리에 난 다시 그 공간으로 돌아왔는데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힘들면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돌아오고 싶다면 오른손을 들어주세요."


그 말에 난 한동안 고민을 하였는데, 지금 이 기분으로 깨어나면 더 슬퍼질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승주의 한숨소리가 멀리서 들려왔고, 난 다시 집중을 하며 최면 상태를 유지했다.



그녀의 ''은 연속간행물입니다. 1편부터 보시면 스토리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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