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밖은 어두웠고, 거리는 조용했다.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는데, 건물 안은 마치 버려진 지 오래된 것처럼 낡고, 텅 비어있었다.
숨을 곳을 찾아 헤매었지만, 모든 문이 잠겨있었고, 차가운 바람과 함께 한 남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뚜벅.. 뚜벅.. 뚜벅...' 남자의 발자국 소리가 텅 빈 건물 안에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반응하며 나는 더욱 두려움에 떨었다.
그때 통로 끝에 열려있는 문을 발견하고, 간신히 몸을 끌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곳엔 낡은 창고가 있었는데 공간은 좁았지만, 다행히 안에서 잠글 수 있는 문이었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문을 밀어닫고, 숨죽여 몸을 웅크렸다.
남자는 복도에 잠겨있는 문들을 일일이 확인해보더니, 이내, 내가 있는 창고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남자가 뒤돌아 나가버렸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뻐하고 있는 것도 잠시, 목덜미로 떨어지는 차가운 액체와 창고 안에 진동하는 악취에 얼굴을 찌푸리며 뒤돌아 보는데...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예랑아. 좀 일어나 봐. 자기야? 자기야!!!"
"헉....!!"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 벌떡 일어나 앉았다.
동공은 풀려있고, 온몸은 심하게 떨렸다.
옆을 보니, 애인 무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괜찮아? 이 땀 좀 봐."
"내가 또 잠꼬대한 거야?"
"응.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 숨을 안 쉬길래... 걱정이 돼서. 대체 무슨 꿈을 꾼 거야?"
이렇게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 몇 달이 되었다.
그동안 무경이 걱정할 까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너 요새 더 못 자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아냐. 내가 요즘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가 봐."
"잠을 편하게 자야지. 옆에서 보는 내가 너무 걱정이 돼. 너한테 무슨 일 있나 하고. 정말 아무 일 없어?"
"없어. 그냥 요새 수업 편성한다고 신경 써서 그래. 미안해."
"정말이야?"
"응. 조금만 지나가면 좋아질 거야. 나 팔베개 해줘. 졸려. 잘래."
응석 부리며 무경의 품에 파고들자,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그가 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난 항상 네 생각을 먼저 해. 널 너무 사랑해서 그런가 봐. 이제는 너 없으면 너무 힘들것 같아. 그러니까 아프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반드시 나한테 먼저 얘기해줘야 해. 알았지?"
"응. 알았다니까. 그만 잔소리하고, 나 좀 꼭 안아줘."
그가 이마에 뽀뽀를 하더니, 양 팔로 감싸 힘껏 안아주었다.
그의 품은 항상 따뜻하고, 숲 속에 있는 것처럼 풀향이 난다.
그의 온기가 나를 평온하게 해준다.
그는 나의 안식터이다.
"자, 인사하겠습니다. 나마스떼."
두 손을 합장하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넨다.
나는 연희동의 한 요가원에서 주부들을 대상으로 요가와 필라테스를 가르친다.
원래 현대무용을 전공하였는데, 학교 졸업 후, 무대공포증이 있어 더 이상의 공연이 어려웠고, 결국 그 길을 포기한 후, 요가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매일 두 타임씩 집 근처인 이 곳 센터에서 레슨을 한다.
집에서 버스로 네 정거장. 매일 걷는 이 거리는 조용하고 한적하며,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이기도 하다.
3년 전, 대학교를 이제 막 졸업한 나를 불러, 부모님은 남은 여생을 제주도로 내려가 조용히 보내고 싶다고 하셨다.
"널 졸업까지 시켰으니 우리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 같이 가던지, 아니면 네 살길은 스스로 찾아보던지 해. 이제 너도 성인이니까. 스스로 책임질 줄 알아야지. 안 그래?"
마치 호랑이가 자기 새끼를 벼랑에서 떨어뜨려 훈육하듯이, 부모님은 내가 강하고 독립적으로 살길 원하셨다. 그래야 당신들이 이 세상에 없을 때에도 혼자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이다.
그건 내가 형제자매가 없는 외동딸이라 더 했다.
그 당시, 자격시험을 앞두고 있던 나는 남을 수도, 그렇다고 따라갈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동안 모아둔 돈을 털어 연남동에 원룸을 구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 주로 잠을 자는 용도로 썼는데, 새벽 6시에 일어나 조깅을 하고, 그 후에는 거의 하루 종일 연습실에서 시험 준비를 했다.
1층은 테라스가 딸린 카페였고, 2층부터 4층은 빌라였는데, 난 그 위에 옥탑방에 살았다.
집은 넓지 않았지만, 앞에 막힌 건물이 없어, 답답하지 않아 좋았다.
그 날도 역시 새벽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 입었다.
집 밖으로 나와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카페에 앉아있던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창백할 만큼 하얀 피부에 갈색머리,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외국인처럼.
가늘고 긴 손가락은 커피잔을 감싸고 있고, 카페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맞춰 손가락으로 '톡톡' 박자를 맞추는 모습이 여유롭고 근사해 보였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그의 강렬한 눈빛에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그가 시선을 돌렸을 때에야 비로소, 굳어있던 몸이 부드러워졌다.
그렇게, 집 앞 카페에서 손무경. 그를 처음 만났다.
이번 챕터는 예상보다 분량이 많아서 연속 간행이 될 것 같습니다. 이후 이야기는 매주 화, 금요일에 발행됩니다. 감사합니다. 나마스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