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코미디
"너보다 먼저 석인이를 만났잖아. 그리고 널 처음 본 것도 석인이 대신이었고. 그래서 나한테는 석인이가 먼저야.
"그게 이유야? 단순히 먼저 알고 만났다는 게?
"모든 만남에는 이유가 있으니까. 만약 네가 진짜 내 인연이었다면 널 먼저 만났겠지."
"네가 무슨 운명론자야? 이유 없는 만남도 없다고 했어. 넌 그냥 너 편한 데로 합리화시키는 거잖아. 나랑 엮이면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생길까 봐, 그런 거 아냐?"
"그래. 아니라고는 못해. 나 지금까지 남자 한번 만나 본 적 없고, 작년에도 아파서 병원에만 있었어. 내 친구들은 여기저기 놀러 다니면서 데이트도 하고 그러는데, 난 몸조차 가눌 수 없었다고. 그런데 그런 내 사정을 아는 친구가 석인이를 소개시켜줬고, 난 감사한 마음으로 그 애를 만났어. 네 말대로 석인이 대신에 널 만나게 되면, 난 내 친구한테도 변명해야 하고, 누구보다 석인이한테 털어놓아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어. 남한테 상처 주면서까지 갖고 싶지 않아, 너란 사람."
"남 탓하지 마. 자신이 없는 게 아니고, 비겁한 거야. 왜 다른 사람 핑계를 대? 네가 누굴 위한다는 그 핑계들이 결국엔 그 누군가를 더 힘들게 할 거야. 넌 가식적이고, 이기적이야."
"내가 왜 너한테 이런 말을 들어야 해? 왜 나를 비난해? 나는 그냥 욕심 안 내고, 남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는 건데 그게 왜 가식적이고 이기적인지 모르겠어."
"그게 비겁한 거야."
그는 땅에 떨어져 있는 가방을 주워 내 손에 쥐어주고는 씁쓸하게 뒤돌아갔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화가 나고, 분하고, 슬프다. '또르르' 볼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주변의 모든 공간이 비워지는 느낌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 언젠가 나는 없고, 또 다른 누군가로 채워지겠지.
그렇게 우리는 언젠가 사라질 테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그와 함께 사라진 것이 있다.
그건 나의 '첫 키스'와 그동안 버티고 있던 '평정심'이다.
며칠 후 집에 돌아와 TV 앞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한껏 치장을 하고 나갔던 수빈이가 들어와 '쪼르르' 옆으로 온다.
"언니, 걔 말이야. 요가매트. 그 자식이 나랑 안 만나겠데. 지네 학교까지 가서 기다렸는데, 글쎄 내가 안 귀여워서 싫데. 그게 말이 돼? 어떻게 생각해 언니?"
"..................."
"어떻게 날 싫어할 수 있어? 이렇게 귀엽고 섹시한데. 아무래도 걔 취향이 이상한 것 같아. 그치? 짜증 나서 안 되겠어. 확실하게 한 번 꼬셔봐야겠어. 반드시 내 걸로 만들어서. 막 상처 줄 거야. 나쁜 여자처럼."
그의 얘기가 듣고 싶지 않아서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수빈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욕을 해댔고, 그 소리가 '웅웅' 들려왔다.
조별 스터디가 있어 모임 후 신촌에 갔다가, 어느 카페 앞에서 지나가는 석찬이를 우연히 보았다.
진회색 체크 셔츠와 청자켓을 레이어드하고 살짝 핏이 있는 밝은 색의 청바지를 입은 그의 모습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얼굴은 조금 수척해 보였는데, 살이 빠져서인지 피곤해서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으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서 있는 약국 앞에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를 내며 한 여자가 다가왔다.
이기적일 정도로 굴곡진 몸매에 하늘색의 퍼 점퍼와 레깅스를 매치한 그녀의 패션 역시 예사롭지 않았는데, 석찬 앞에서 선글라스를 벗자, 그녀의 아찔한 미모가 드러났다.
꽤 이국적인 마스크로 특히 살짝 올라간 눈매가 매력적이었는데, 언젠가 패션잡지에서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는 모델과 흡사했다.
원래 아는 사이인지 그녀는 석찬이에게 반갑게 아는 척을 했고, 그 역시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두 사람이 미소를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누자, 순간 주변의 모든 공기가 진공상태로 팽창하였다.
그 자리에서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잠시 후, 걸음을 옮기더니 근처에 주차되어 있던 하얀 세단을 타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그때 왜 석찬의 고백을 거절했는지, 왜 그의 말에 화가 났는지, 그리고 눈물이 났는지...
내가 아는 그는 '다른 세상 속'의 사람이다.
우리는 동시대에 태어나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절대로 교집합이 될 수 없는... 이질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삶의 차원이 다르다.
그와 있으면 재미있고, 신선하고, 짜릿했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몸이 떨렸고, 가슴이 두근거렸으며, 달콤하고, 뜨거웠다.
하지만, 그의 그런 점이 날 두렵게 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좋다고 하였으나, 그 차이를 받아들이기엔 내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건 '자존심'으로 포장한 나의 '열등감'이기도 했다.
열네 살 때, 유통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해, 가지고 있던 재산을 압수당하고, 수 십억의 빚까지 떠안게 되었다. 이 일로 아버지는 홧병에 걸렸고, 얼마 후,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채무관계는 정리가 되었지만, 문제는 엄마와 내가 빈털터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기를 당해서 재산이 압류되고, 빚쟁이들에게 쫓기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가 사는 먼 지방으로 도망가다시피 떠난 엄마와 나.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왜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오는 걸까...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것을 자각했을 때의 '무기력함'이다.
움직일 수도, 생각할 수도, 그렇다고 멈춰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버겁게 만드는 구렁텅이에 빠져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기다려야 한다. 나에게 다시 빛이 올 때까지...
장례식을 치르자마자, 어머니는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평생을 살림밖에 모르고 살았던 그녀가 집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새색시처럼 수줍음 많고, 겸손하며, 상냥했던 어머니는 3년 만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낮에는 생선을 손질하고, 밤에는 야시장에서 전을 부치며 그렇게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손님과 시비가 붙어 실랑이를 하다가, 말이 안 통하면 '악악'대며 싸우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오히려 그래야 살 수 있다고 했다. '센'척해야 아무도 무시하지 않는다고...
내 앞에서는 예전의 고운 모습을 보이려 애를 썼지만, 낡은 옷차림과, 구멍 난 양말, 점점 늘어가는 흰머리와 얼굴을 덮은 검버섯이 나를 슬프게 했다.
엄마를 이해하면서 나는 어른이 되었다.
'삶'은 비극인데, '세상'은 자꾸 웃으라고 한다.
웃어야 살 수 있는 게 인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생은 코미디다.
어느 날, 피곤에 지친 엄마가 '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다'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그 말이 듣기 싫어서, 그만... 핑계 대지 말라고, 남 탓하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그때 나를 보던 엄마의 퀭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냥, 엄마의 거친 손을 잡아줬더라면, 따뜻하게 안아줬더라면, 아니 환하게 웃어줬더라면... 그러면 되는데, 난 왜 그렇게 모진 말로 그녀에게 상처를 줬을까...
석찬이의 지적에, 그 기억이 떠올랐고, 내 말에 충격을 받아 마른 울음을 흘렸던 엄마가 떠올랐고, 그런 내가 너무 미웠고, 정말 미안해서... 그래서 화가 나고, 분하고, 눈물이 났던 것 같다.
그 뒤로 석찬이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수빈이가 몇 번 연락을 했지만,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학교에서 자취를 감췄다고 했다. 언젠가 석인이가 지나가는 말로 석찬이의 소식을 전해줬는데, 시카고의 자매학교에 교환학생으로 뽑혀 유학을 갔고 남은 학기를 그곳에서 보낸다고 했다. 한동안 상심해있던 수빈이는 점점 그를 잊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학교의 킹카가 그 옆자리를 채웠다.
석인이와는 그렇게 1년 정도를 만났지만, 우리는 함께 있으면 편하고 위로가 될 뿐 그 이상의 이성 관계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같이 영화를 보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밥을 먹고, 거리를 걷고, 차를 마시고, 노래방도 가고, 술도 마시고 했지만 그를 보면 자꾸 누군가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석인이는 여동생의 몸에 열꽃이 펴서 병원에 있고, 수빈이는 애인과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으며, 나는 다음 학기의 학비와 생활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늘려서, 그 날도 새벽 2시가 넘어 귀가를 했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현관 앞 벤치 위에 놓인 캔커피를 보았다.
캔 밑에는 사진 한 장이 있었는데 가까이 들여다보니, 석찬이와 처음 만난 날 찍었던 플로라이드였다.
장난기 가득한 그의 얼굴과 못생겨 보이는 내가 그 사진 안에 함께 있다.
멍하니 사진을 들여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다녀갔고, 다시 떠.났.음.을... 깨달았다.
얼마나 이 곳에서 머물렀는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이 캔커피가 차가워질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진을 뒤집어보니 작은 손글씨로 '킹카 간첩과 찐따 외계인'이라고 쓰여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났고,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임을 알 수 있었다.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거짓말처럼 눈이 내렸다.
'소복소복' 내리는 하얀 눈은 어릴 때 아버지가 사주셨던 솜사탕을 떠올렸다.
부드럽고 달콤한 솜사탕 하나에 행복했던 나.
동이 틀 때까지 그 흰 눈을 고스란히 맞으며, 그가 남겨 준 사진과 함께... 나는 '눈사람'이 되었다.
졸업 후, 작은 출판사에 취직했다.
어릴때부터 동화작가가 꿈이었는데, 당장은 어렵겠지만, 조금씩 준비해간다면 언젠가는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첫 월급을 받자마자, 엄마가 전에 즐겨 입었던 잔꽃무늬 원피스를 사서 선물로 드렸다.
그리고 빳빳한 만 원짜리 서른 장을 봉투에 '꾹꾹' 눌러 담아 함께 드렸다.
원피스 선물에는 시큰둥했던 그녀가, 돈다발을 세어보더니 기쁘다며 '엉엉' 울어버렸다.
좋은데 왜 우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말없이 엄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3학년이 되기 전, 석인이는 군에 입대를 했다.
그리고 입대하기 반년 전에 우리는 공식적으로 결별했다.
남녀 사이에 안정과, 편안함, 의리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정'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나 때문인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가 떠나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 순간만큼은, ' 듣고 싶어 하는 말'보다 '필요한 말'을 해주는 것이 더 그를 위하는 것 같아서였다.
출판사에 다니면서 수빈이와 만날 기회가 있어 함께 차를 마셨는데, 그녀는 여전히 예쁘고, 쾌활하고, 행복해 보였다. 얼마 후 결혼을 한다고 했다. 핸드폰에 저장된 약혼자의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의외였다.
그렇게 몸 좋고,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더니, 약혼자는 전혀 다른 타입으로 평범하고 수수해 보였다. "요새는 '뇌섹남'이 대세잖아. 우리 자기가 얼마나 똑똑한 지 몰라. 애 낳으면 멘사 보내야 할까 봐."
약혼반지를 보여주면서, 자녀계획까지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있다는 얘기의 끝에, 석찬이 얘기가 나왔다. 그가 자신에게는 유일한 짝사랑'이었다고, 그리고...
"언젠가 걔 이마에 흉터를 본 적이 있는데, 걔 형 있잖아. 집 앞에 언니 데려다 줄 때 마주쳤는데, 신기하게 이마에 똑같은 흉이 있더라? 아무리 쌍둥이라도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
그 날은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나중에 곰곰이 따져보니까. 그 두 사람을 같은 자리에서 만난 적이 없더라고. 언니는 있었어?"
처음엔 수빈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수빈이는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며 "내가 한중대 아는 사람이 있어서 알아봤는데... 그 학번에 '장석인'이라는 사람은 없데..."
'똑똑' 노크를 했다.
살짝 문을 밀자, 잠들어있는 김 작가가 보인다.
깨우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의자에 앉아 기다렸는데, 그는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 잠에서 깨어나, 그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몸을 좀 일으켜 줘."
침대를 세워 그를 앉히고, 물컵을 내밀었다.
"이제 잠수도 못 타고 꼼짝없이 병원신세 지게 생겼어. 시연씨는 좋겠네. 괴롭힐 사람 없어서."
"농담하시는 거 보니 멀쩡하시네요."
키득키득 웃는 그.
"얼마 안 남았데..."
"아니에요. 김 작가님은 멘탈이 강해서 괜찮을 거예요."
"시연씨. 우리 작업 언제부터 시작할래? 내가 아이템은 생각해 둔 게 있어. 요새 계속 정리하고 있거든."
"작가님 사실은 오늘 말씀드릴게 있어서 왔어요. 저 이번 작품은 같이 못 할 것 같아요."
"왜?"
"저 가을에 결혼해요. 시간이 별로 없어서 당분간 일을 쉬려고 해요. 그래서 작가님한테 다른 에디터 소개해드리려고요. 저보다 경력도 많고, 인품도 훌륭한 분이에요."
"시연씨. 내가 원래 스릴러 소설 썼던 거 알아?"
"그랬어요? 처음 들어요."
"데뷔해서 나름 인정도 받고 그랬는데... 우리 아들이 4살 때 사고로 먼저 갔어. 그 애 가고, 내 와이프도 떠나고, 나 혼자 집에 남아서... 며칠을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문득 아들 얼굴이 생각이 나질 않는 거야.
남들 다 하는 백일잔치, 돌잔치 한 번 해준 적 없고, 그 애를 제대로 안아준 적이 없었어.
애 우는 소리가 듣기 싫었거든. 작업하는데 방해받을까 봐 집에 잘 들어가지도 않고...
그래서 14년을 그 애를 생각하며 동화책을 썼어. 항상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러면 그 순간은 마치 내가 좋은 아빠가 된 것 같더라고.
이제 곧 그 아이와 만나게 될 텐데. 나한테는 이번 작업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아.
그런데 끝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만약 내가 중간에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 완성은 시연씨가 해줬으면 해.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시연씨는 실력도 최고니까.
지금까지 나 때문에 힘들었는데, 미안하지만... 한 번만 더 고생해주면 안 될까?"
간곡한 부탁에 차마 그 앞에서 거절을 하지 못하고, 병실 문을 벗어났다.
2년 전, 친구 소개로 만난 지금의 애인은 초등학교 교사이다.
차분하고, 자상하고, 배려심 많은 점이 끌렸고, 내가 동화책을 구상할 때 아이들에 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있어, 애인이 되고, 친구 같으며, 오빠이고, 아버지처럼 버팀목이 되어준다.
이 모든 것을 이 사람과 함께 누릴 수 있어 행복하다.
에레베이터를 타는데 마침 그에게 전화가 왔고, 로비층을 누른 후,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닫히는 문 앞으로 누군가 뛰어오길래, 무의식적으로 '열림'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쳐다보게 되었는데 그는 바로 '장석찬'이었다.
Y대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그는 마치 방부제를 먹은 듯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그의 눈과 나의 눈이 뒤섞이고, 함께 시간을 거슬러 11년 전으로 되돌아가 그 신촌 거리에 함께 머물렀다.
우리는 서로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었다.
혹시 우연히라도 그와 마주칠까 봐 겁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그런데 11년이라는 시간은 기억과 감정을 희미하게 지워주었고, 이미 나에게는 색이 바랜 플로라이드 사진과 다를게 없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떨리는 그의 눈빛.
그 영겁과 같은 찰나에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이 손을 잡는다면 나는 아마도 지나버린 시간 안에서 어긋난 퍼즐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맞출 수 없더라도 최소한,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천천히 '열림'버튼에서 손을 떼었다. 문이 닫히려 한다. 그의 손은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지만, 나는 그 손을 잡지 않기로 했다. 천천히 닫히는 문 사이로 그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 여보세요? 시연아. 왜 말이 없어? 시연아- 핸드폰을 귀에 대고 약혼자의 부름에 응답했다.
- 미안해요. 잠시 졸았나 봐. 꿈을 꾼 것 같아.-
- 요새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쉬지를 못해서.-
그와 통화를 하며 병원을 빠져나왔다.
오늘 나는 '첫사랑'과 재회했다. 그리고 그와 다시 '결별'을 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
그는 내 기억 속에서 영원할 것이고, 그와의 기억은 나에게 추억으로 남을 테니까...
이제 나는 꿈꾸던 현실에서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할 수도 있지만, 기꺼이 도전하고, 받아들일 자신이 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면서 좋은 기억들은 나에게 용기를 주고, 웃음을 주고, 힘을 줄 것이다.
그 추억을 훼손하지 않고 지키는 것이 스물한 살의 나에게 주는 내 선물이기도 하다.
나는 그렇게 또 어른이 되어간다.
첫 연재를 마치며...
완성의 기쁨보다는 솔직히... 겁도 없이 왜 시작했을까라는 후회와 함께 부족함에 대하여 몸서리치고 또 몸서리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쥐어짜 본들, 이 부족함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시작이 있고, 그 시작이 발판이 되어 한 발 한발 나아갈 수 있기에, 끝까지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첫사랑'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누구에게나 아름다울 그 기억들이 사실, 어딘가 어긋난 퍼즐처럼 양면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이 이야기를 시작해보았습니다. 미스터리 한 느낌을 살리고 싶었는데, 표현력이 많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그 부족함과 타협하지 않는 좋은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오늘도 한걸음 한걸음 멈추지 않겠습니다.
조언과, 격려와 응원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1월 12일에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