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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집개구리 Jan 05. 2016

'샴'의 추억 I

쌍둥이 형제의 미스터리

'그'를 다시 만난 건, 서울의 'Y' 대학병원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처음에는 그가 맞는지 확신이 없어 흘깃흘깃 쳐다보았는데,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그가 계속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다급히 중앙 에스컬레이터로 뛰어갔다. 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린다. 왜 이러지... 그냥 닮은 사람일 수도 있는데...


8층에 내려 복도를 지나 한 병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805호', '환자 김종호'

그림동화책 출판사에서 에디터로 일을 하는 나에게는 5년째 담당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

유아 출판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는 '김종호'. 그는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선 만드는 사람이 먼저 행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페이지마다 따뜻한 숨결이 채워지고, 그 한 장 한 장이 모여 한 권의 '영혼'이 깃든 '진짜' 책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글이 안 써질 때는  며칠씩 잠수를 타곤 했는데 그의 스케줄과 미팅 일정, 작품 기획부터 교정까지 전반적인 케어 업무를 하고 있던 나로써는 여간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그를 전담 맡은 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는 틈만 나면 사라지는 그를 추적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날이 많았고, 툭하면 연락이 두절되는 그의 휴대폰에 위치추적기를 설치하다 걸려 잘릴 뻔도 했으며, 흥신소 이반장과는 절친이 되었고, 전국 팔도 유랑에 더 나아가 잠수 장소로 일본, 중국 등 최근 무대가 글로벌해진 그를 찾아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등 온갖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사람 속을 그렇게 썩이더니 이 괴짜 작가가 두 달 전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항암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입원을 거부했던 그는 3일 전 자택에서 쓰러져 응급실로 호송이 되었고, 여전히 치료를 거부한 채, 진통제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먼저 연락이 왔다. 마지막 소설을 구상하고 있는데, 같이 고민해보자고. 그래서 난 지금 그의 병실 앞에 서 있다. 그동안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는데, 이 와중에 아까 로비에서 보았던 '그'가 자꾸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아주 오래되어 희미한 기억일  뿐인데...




'그'를 처음 만난 건, 11년 전 내가 스물한 살 때이다.

대학 입학 후  첫날 등굣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다리와 팔이 부러졌다. 근 10개월 동안 수술과 물리치료를 번갈아 받으며 재활을 했고, 어느 정도 거동이 가능해질 무렵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병원에서 오래 지내서인지 대학 생활 자체가 나에게는 커다란 도전이었다.

수강신청은 복잡하고, 교재는 어려웠으며, 복학 후 학년이 달라진 동기들은 얼굴 보기 힘들고, 같이 지 1년 후배들은 불편하고, 까다로웠다.


특히 그때까지 연애 한번 한적 없던 나로써는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캠퍼스를 활보하고 다니는 커플들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고, 사고 후  신체적인 콤플렉스도 있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베프인 '영미'가 복학 선물로 소개팅을 해주겠다고 연락을 했다.

그렇게 '한중대 전자공학과 2학년'이라고 소개받은 그와 학교 앞 카페 '당심'에서 처음 만났다.


185가 넘는 큰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와 다부진 체격,  선이 굵고 강한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원래 내성적이고 낯을 잘 가리는데다 가뜩 첫 소개팅이라 긴장하고 있는 나에게 그가 먼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동갑인데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장석인이라고 해. 반갑다."

"응... 그래. 시연. 고시연이야. 서중대 철학과"

"고시연. 이름 좋다. 철학과는 좀 의외네. 생긴 건 유아교육과 같아. 너 무척 어려 보이거든."


해맑게 웃는 그의 표정이 매력적이었고, 이어지는 화제들마다 명쾌하고 긍정적인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좀 아팠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니?"


즐겁게 이어졌던 대화 끝에 조심스레 물어오는 그의 질문에 당황한 표정을 짓자 이내 미안한 얼굴로,


"소개시켜준 누나한테 네 친구가 그랬데. 네가 몸이 좀 안 좋아서 회복 중이라고.  그래서 무슨 사정이 있구나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널 보니 차분하고 밝아서 잘 이겨내고 있구나 싶어서. 나 같으면 정말 힘들었을 텐데"


동정은 사절이지만, 내 기분을 살피며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그의 말투에 배려가 느껴졌다.

집으로 오는 길에 그는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소방공무원이신데 현장에 자주 계셔서 집에 잘 못 들어오시고, 어머니는 이모와 함께 종로에서 '곰탕'가게를 하신다고 했다. 남동생이  하나 있고,   열두 살이나 어린 늦둥이 여동생이 있다고, 그래서 그 여동생이 커서 대학교에 입학하면 자기가 학비를 대줄 거라고, 아직은 가진 게 없지만, 하나하나씩 이루고 싶다고. 효도도 하고 , 여행도 다니고, 가족들과 그렇게 오손도손 여유 있게 사는 게 꿈이라고 했다.

집 앞에서, 석인이는 시간이 괜찮으면 내일 저녁에 같이 밥을 먹고 싶다고 했고, 난 흔쾌히 그러자 했다.

그렇게 다시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한 후 우리는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수업을 듣고 있는데, 메시지가 왔다.


- 몇 시에 끝나? 너네 학교 앞에서 기다릴게.-

- 한 타임 더 남았는데 어쩌지? 우리 원래 3시간 후에 보기로 하지 않았어?-

- 응. 맞는데 내가 시간이 좀 애매해서 일찍 왔어. 신경 쓰지 말고 수업 끝나고 나와~ 근처에 있을게-


신경을 어떻게 안 쓰니. 다행히 다음 수업이 교양이긴 한데...

우선 강의실에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으려는데, 먼저 와 있던 '수빈'이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한다.

집이 멀어 복학 후 학교 근처에 자취를 알아보고 있는데 마침 전공수업을 같이 듣던 이 아이가 그 말을 듣고 자기랑 같이 지내자고 했다.

언니라면 든든할 것 같다며. 복학 후 영어 과외를 시작해서 전혀 수입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직 몸에 무리를 주면  안 되어서 지금은 지출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다 싶어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수빈이는 나와 많이 달랐다.

인형 같은 예쁜 얼굴에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과 애교까지 더해 교내에서도 아주 인기가 많았다.

집도 부유해서 부족한 게 없지만, 그녀의 '안전'을 염려하신 부모님이 룸메이트를 구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셔서라고 했다.

그녀가 제시한 월세는 다른 집의 반값도 안 되는 금액으로 마침, 내게 적절한 조건이었고, 혼자 지내던 중 학교생활이 적적했던 터라 오히려 그녀의 제안이 고마웠다.


그녀와 같이 살면서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어딜 가건 그녀의 주위에는 눈을 떼지 못하는 남자들의 시선과 관심이 넘쳤고, 그녀는 더 나아가 우리 학교를  대표하는 '퀸카'가 되었다.

게다가 성격도 좋아서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특히 여자 선배들은 단체 미팅이나 소개팅에 에이스가 필요할 때 그녀에게 S.O.S를 청하였고, 그녀는 우아하고 매너 있게 자리를 빛내주어 그들의 프라이드를 한껏 고양시켜주었다.


그에 반해 나는 173이 넘는 껑충한 큰 키에 보이시한 스타일, 그리고 감정표현이 단순하고 직관적이어서 매력이 없는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성에게 어떤 호감 어린 표현도 받아본 적이 없다.

불만은 없다. 신은 공평하다고 했다.

신은 나에게 여성스러운 아름다움 대신 어떤 어려움과 고난에도 꿋꿋이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셨으니까. 그걸로 된 거다.  




교수님이 출석 체크를 하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자 손을 번쩍 들어  대답한 후 주위를 살폈다.

볼펜을 입에 물고 교재를 넘기던 수빈이가 "언니 왜 그래? 어디 가?"묻는다.

가방 안에 다시 책을 넣고 수빈이 입에 손가락을 대며.


 "쉿, 조용히... 나 수업 째야 할 것 같아."


수빈이는 눈이 동그래져


"왜?"

"좀 있다 집에 가서 얘기해줄게. 저녁에 봐."


그녀와 인사를 하고 낮은 보폭 자세로 살금살금 출입구로 향했다.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복도로 나오니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이 후들거려 간신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정문으로 급히 가는데, 멀리서도 그의 윤곽이 뚜렷이 보였다.

오늘따라 더 남자답게 보이는 강한 그의 눈매와 날렵한 콧날이 눈에 확 띄었고, 그 이미지가 선이 좀 더 날카로운 다니엘 헤니와 닮았다.

정문을 오고 가던 여학생들이 흘끔흘끔 그를 쳐다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벽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는 그의 모습은 유유자적 평온해 보였다. 쭈뼛쭈뼛 그 앞에 다가가는데 그가 고개를 획 들어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보고 바로 손을 흔들었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자 책을 가방에 넣더니 낮은 목소리로. "시연아" 하고 부른다.


"응?"

"시연이 맞지? 낮에 보니까 또 달라 보인다. 근데 너 수업 있다고 하지 않았어? 빨리 끝났네."


차마 네가 기다릴까 봐...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응'하며 얼머부리려는데


"너 수업 쨌지?"


정곡을 찔려 헛기침을 하자, 짓궂게 "맞아? 찍었는데. 왜 그랬어? 나 빨리 보고 싶어서?" 묻는다.

대답 없이 눈을 깜빡이자, 무안할 정도로 빤히 쳐다보던 그가 또 웃으며 "너 되게 귀엽다." 하더니 '덥석' 손을 잡는다.


"가자~ 저녁 뭐 먹을래?"


갑자기 손이 잡힌 나는 당황해서 대답 대신 우물쭈물 손을 빼려 했고, 그는 더욱 손에 힘을 주며


"너 지금 남자 처음 보는 사람처럼 엄청 어색해 보여. 그러니까 좀 웃어봐. 여기 너네 학교잖아."


주위를 둘러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고 있어,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학교길을 지나 맛집들이 몰려있는 신촌의 메인 거리를 걷다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춘 그가 "쵸코랑 바닐라 중에 뭐 먹을래?"하고 묻는다.


 "바닐라"

 "난 쵸코가 더 좋지만.. 그래 알았어."


잠시 후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개를 사서  내미는 석인이. "자 먹어 봐."

또 당황한 나는 "어... 잠깐."하며 몸을 뒤로 뺐다.


"너 자꾸 움찔움찔할래?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왜 그래 민망하게. 먹어봐."


얼떨결에 한 입 베어 물었더니, 그걸 또 자기 입으로 가져가 먹는다.


"너 뭐해?"

"뭐가? 왜?"

"너랑 나랑 언제 봤다고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어? 지저분하게. 하나 더 사면 되잖아."

"둘이 먹어도 충분한데 뭘 또 사. 학생이 무슨 돈이 있냐? 그리고 나 이런 거 해보고 싶었단 말이야. 재밌잖아. 로맨틱하고. 그리고 아마 내가 너보다 더 깨끗할 걸? "


지갑에서 이천 원을 꺼내어 "자 돈 줄게. 니 꺼 사와. 그리고 이런 거 하고 싶으면 딴 데가서 해. 나 안 먹어."

뻣뻣하게 구는 나를  어처구니없이 쳐다보다가


"알았어. 알았어.  안 뺐어먹을게. 너 혼자 다 먹어. 나 원래 단 거 안 좋아해."


그가 내민 아이스크림을 노려보다가 "진짜지?" 물었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휙' 콘을 뺏어 먹고 있는데 옆에서 "애처럼. 또 진짜냐고 묻는 거 봐." 키득거린다.


저녁으로 카레밥을 먹고 배가 불러 걷기로 했다. 메인 스트리트 한복판에서 밴드가 공연을 하고 있는데, 그걸 본 석인이가 다시 내 손을 잡더니 맨 앞에 자리를 잡는다. 부러운 표정으로 연주자를 보던 그가 잠시 후,


"나 원래   음악하고 싶었어. 어렸을 때부터 노래할 때가 제일 행복했거든."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그의 눈동자가 깊어진다.


"다시 태어난다면 노래만 할 거야. 나만 생각하고,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 거야. 완전 이기적으로."


왠지 그의  옆모습이 쓸쓸해 보여서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같이 공연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공연이 끝나고 거리를 걷는데,  5월의 밤은 그리 춥지 않고, 따뜻한 바람과 함께 거리 곳곳에는 작은 조명들이 우수수 보석처럼 빛을 내고 있다.  


"우리 만난 기념으로 사진 찍을래?"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거리  한쪽에 할아버지 한 분이 플로라이드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잠시 후, 그와 포즈를 잡고 '하나, 둘, 셋, 찰칵! 지이잉~' 사진기를 밀어내며 얼굴을 든 필름 사진을 가볍게 공기와 마찰시키며 털어낸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연속동작 두장이었다.


"한 장씩 가지면 되겠다."

"응. 그러자."

"그런데 너 엄청 못생기게 나왔다. 안 웃어서 그런가? 좀 웃어봐. 무슨 애가 계속 인상을 쓰고 있어. 무슨 고민 있어?"

"아닌데... 나 고민 없는데?"

"거짓말..."

"내가 왜 거짓말을 해. 진짜야."

"아니면 말고. 또 화내는 거 봐."

"화내는 거 아니야. 자꾸 말꼬리 잡고 따질래?"

"우아~ 너 그러다 한 대 치겠다? 어디 무서워서 말 좀 섞겠니?"

"네가 자꾸 깐족깐족거리잖아. 장난이나 치고."

"재밌잖아~"

"하나도 재미없거든?"

"뻥치지 마 너. 오늘 나랑 있으면서 계속 웃은 거 다 알아. 솔직히 말해 봐. 어제보다 오늘이 더 재미있지?"

"어제나 오늘이나 뭐가 달라. 똑같지."

"어떻게 똑같냐? 사람이 다른데."

"다르긴 뭐가 달라. 너랑 나랑 같은데."


그가 잠시 빤히 쳐다본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있었다. 그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시연아."

"응?"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뭔데?"

"나... 사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말해 봐."

"나.... 간첩이야."

"..............................."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야. 너 혹시 우리나라가 분단국가라는 건 알고 있지? 그래서 북에서 간첩들 막 투입시키거든. 생활형 간첩. 난 엘리트 간첩.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너한테는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

"..............................."

"뭐라고 말 좀 해봐. "

".............................."

"고시연?"

"나도 너한테 말 안 한 거 있는데, 나 사실 지구인이 아니야. 화성 마르스에서 지구인들 감시하라고 아버지가 이 곳으로 보내셨어."


그 말을 듣던 그가 가늘게 눈을 뜨고 위아래로 훑어본다.


"그래서 네가 몸이 역삼각형이구나~ 팔다리는 얇고 배는 튀어나오고~ 어쩐지 머리도 좀 큰 거 같고..."

"응 맞아. 기분 나쁘면 레이저도 발사되고 팔에서 쇠주먹도 튀어나와. 한번 볼래?"


주먹을 불끈 쥐고 그의 배를 가격했다.

"욱" 허리가 꺾여 신음하는 그.


"그냥 치는 게 어딨어? 신호를 먼저 줘야지."

"아, 미안. 그럼 또 때려도 돼?"


잽싸게 뒤로 물러선 그가 손을 뻗어 거부한다.


"나 다치기 전엔 합기도 유단자였어. 까불지마."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집으로 들어가는데 뒤에서


"나 장석인 아니야. 동생이야. 쌍둥이 동생 장석찬. Y대 1학년이고."

"뭐라고?"

"형이 학교에 급한 일이 생겨서 나한테 부탁을 했어. 사실 처음에 말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버렸어."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한참을 그를 쳐다보았다.


"미안해.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너랑 있다 보니까 재미있고 편해서..."




집에 들어와 찬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나오던 수빈이가 쪼르르~ 다가온다. "언니, 오늘 낮에 우리 학교에 Y대 킹카 뜬 거 알아? 그런데 글쎄 걔가 우리 학교 어떤 찐따랑 같이 가더래."

물컵을 들고 휙 등을 돌려 수빈이를 노려보았다. 움찔하는 수빈이.


"왜 그렇게 무섭게  쳐다봐. 설마 그 찐따가 언니는 아니겠지?"

"야! 이수빈!!!!"

"헐... 맞나 보네. 걔 지네 학교에서도 유명하잖아. 여자들이 맨날 쫓아다닌데... 인기 장난 아닌가 봐. 걔가 또 의대 과톱이라 과외비로 몇 천씩 번다는 얘기도 있어. 언니 그런 애를 어떻게 알아? 친해? 나 좀 소개시켜줘."

"몰라. 하나도 안 친해. 난 모르는 사람이야. 소개팅은 개뿔."


다음날,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석인이가 찾아왔다.


"찬이한테 얘기 들었어. 많이 놀랬지?"


밥 먹던 숟가락을 놓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리 쌍둥이라도 분명 외모상으로 다른 점이 있을 거다. 샅샅이 그의 얼굴을 뜯어보아도 도통 차이점을 알 수가 없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연락을 했어야지."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는데, 동생이랑 통화하다가 어제 소개팅 했다고 하니까 마침 신촌이라고, 자기가 대신 얼굴 보고  상황 설명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해서. 첫 약속인데 내가 괜히 너 바람 맞히는 걸로 생각할 수 있다고... 미안해. 많이 화났어?"

"꼭 사람 우롱하는 것 같잖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바빠도 네가 상황설명 전화 한 통이면 끝날 문제였어."

"그래. 너무 경황이 없어서 미쳐 거기까진 생각 못했어. 미안해. 화 풀어."


석인이는 조금 더 부드럽고 차분하고, 말도 조곤조곤 조리 있게 하는 반면, 석찬이는 날카로운 눈매에 웃을 때 입꼬리 한쪽이 올라가 자칫 시니컬해 보인다. 성격은 제멋대로이고.


"나 너한테 사과하려고 수업도 안 들어갔어. 다신 안 그럴게."

"알았으니까 지금이라도 너네 학교 가. 나 수업 있어. 금방 들어가야 돼."

"너 화 풀리기 전엔 안 갈래."

"빨리 가. 화 안 났어. 그냥 기분이 안 좋았을 뿐이야. 따지고 보면 네 잘못도 아닌데 뭘."

"그럼 저녁에 시간 어때? 같이 밥 먹자. 몇 시에 수업 끝나?"

"오후에 전공 수업이 있어서 잘 모르겠어. 연장될 수도 있고."

"그래, 그럼 어떻게 될지 연락 줘. 난 수업 끝나면 여기로 넘어올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기 무섭게, 다른 테이블에 있던 수빈이가 쪼르르 달려온다.


"언니, 저 킹카는 또 누구야?"

"나 며칠 전에 소개팅 했잖아."

"아~ 그럼 쟤가 그 Y대 킹카 형이야? 분위기 있네~ 언니 진짜 그러지 말고, 나 쟤 동생 좀 소개팅 해줘."

"나 진짜 걔 몰라."

"그러면 전번만 따 줘. 시나리오는 내가 알아서 쓸게"

"너 그 S대랑 만나는 거 아니었어? 만난 지 얼마 안됬잖아."

"뭐, 걔는 걔고, 얘는 얘고, 내 인생이 어떻게 될 줄 알고 한 명한테 올인을 해? 골고루 만나봐야 남자를 알지."

"저번 주에 너희 어머님이 전화번호를 주고 가시면서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라고 신신당부하시더라. 나 지금 전화 좀 드려도 되겠니?"

"아~ 안돼!! 언니!! 정말 이러기야! 번호만 따달라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깐. 번호 넘겨주면, 요가매트 줄게. 한 장, 아니 두 장~"


아... 요가매트. 너무도 매력적인 조건이다.




저녁에 신촌역 앞에서 석인이를 다시 만났다.

그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같이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산소 같은 매력.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평온하다. 반면 석찬이는... 불편하게 하는 뭔가가 있다. 뭔가 공격적이고, 날카롭다. 두 사람을 자꾸 비교하는 자신이 마음에 안 들지만,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밥을 먹고 함께 거리를 걸었다.


"석찬이가 그러더라. 너 괜찮은 것 같다고. 잘 해보라고."

"....."

"걔가 누구 칭찬하는 일 별로 없는데, 네가 마음에 들었나 봐."

"고맙네. 좋게 봐줘서."

"시연아."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너 괜찮은 사람이라고. 너랑 잘해보고 싶은데. 우리 만나볼래?"


그 말에 발걸음을 멈춰 한동안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게 이유야? 나랑 만나고 싶은?"

"설명하기 좀 쉽지 않은데... 너랑 잘 통하는 것 같아. 대화도 편하고. 너는 내가 별로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좀 갑작스러워서. 나 사실 연애 처음이거든."

"나도 뭐, 많이 만나본 게 아니어서... 그냥 그렇게 시작하는 것 같아. 호감으로... 그러면서 점점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이해하고, 아껴주고, 그런 거 아닌가?"

"아직... 잘 모르겠어."

"그래 그럼, 네가 좋을 때 시작하자. 기다릴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그의 모습이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분명 이 감정은 호감 이상이 맞는데... 그가 더 멀어질까 두려워졌다.


"석인아."

"응?"

"그러자."

"정말?"

"응. 그런데 천천히 갔으면 좋겠어. 감정도 만남도 천천히. 멀미 안 하게."

"그래. 천천히. 알았어."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인가?"

"응."


입이 귀에 걸린 석인이. 웃는 모습이 애처럼 환하다.

뭔가 파이팅 하자는 의미로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였다. 석인이는 동그랗게 눈을 뜨더니  '피식피식'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사귀자는데 악수하는 여자는 아마 고시연. 너밖에 없을 거야."


그 말에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서 그를 버리고 걸었다.

뒤에서는  계속 웃고 있는 석인이가 얄미워 속도를 냈지만 얼마 못 가 그에게 따라 잡혔다.

그렇게 나에게 첫 남자친구가 생겼다.




집에 들어오니 마침 수빈이는  TV 앞에 누워 얼굴에 마스크팩을 붙인 채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핸드폰에 석찬이의 연락처를 전달했다. '띠링띠링'


"매트 어딨어? 약속 꼭 지켜라."


그리고, 며칠 후, 교양수업 강의실에서 심드렁하게 앉아있는 석찬이를 발견했다. 그냥 지나치는데 먼저 알아본 그가 노려본다. 무시한 채 최대한 먼 쪽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강의 내내 석찬이의 시선을 느꼈지만,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런 나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던 그가 벌떡 일어나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뭐야 너?"

"이제 아는 척하네?"

"저리 안가? 이게 정말!"


주변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봐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무 창피해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비명을 질렀고, 강의중인 교수님이 놀라 "자네  뭔가?"라고 묻자, "교수님... 죄송한데 제가 지금 응급실에 가야 할 것 같아서요,,, 도저히 혼자 갈 상태가 아닌데... 이 친구 도움을 좀 받았으면 합니다. " 그의 애절한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간 교수님이 같이 데리고 나가라며 손짓을 하자, 그가 비틀거리는 '척'하며 내 허리를 움켜잡는다.


"손 안 떼? 너 진짜 죽고 싶냐?"

"우선 여기서 나가자."


강의실에서 벗어나 한적한 벤치에 앉은 석찬.


"잘 지냈어?"

"너 미쳤어? 여기가 어딘데 와. 너네 학교 가라고. 강의 듣고 싶으면 수업료를 내던가. 왜 남의 학교 와서 행패야 행패는!"

"너 내가 보낸 메시지 받았지?"

"무슨 메시지?"

"이것 봐라. 아주 작정하고 시치미 떼고 있네. 너 수빈인가 수달인가 하는 애한테 혹시 내 번호 팔았냐?"


뜨끔하며


"무슨 소리야. 내가 니 번호를 왜 팔아? 그리고, 나 그런 애 모르거든?"

"너 우리 형한테 내 전번 물어봤다며. 한 번도 나한테 연락한 적 없는데 그럼, 나한테 관심 있어서 물어본 건 아닌 것 같고. 너 팔았잖아. 그 애가 처음에 전화해서 깍듯이 인사하더라. 서중대 철학과 다닌다고. 같은 과 같은 학년인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

"그래서. 지금 그걸 따지러 여기까지 온 거야? 나까지 강의도 못 듣게? 너 완전 또라이구나."

"솔직히 말해 봐. 요가매트 두장에 내 전번 팔았어. 안 팔았어?"

"........"

"팔았지? 그러면서 뭐 누구보고 또라이라고?"

"이제부터  노코멘트하겠어."

"고시연.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남산 위에 저 뻔뻔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그걸 지금 조크라고 했냐?"

"웃었어? 니가 웃어야 그게 조크지. 너 안 웃었잖아."

"내가 진짜 말을 말자. 가라 좀. 그만 괴롭히고. 나랑 대체 무슨 악연이 있어 이러는 거니."

"붙잡아도 갈 거야. 더럽고 치사해서. 나도 공사다망하고 무척 바쁘거든? 대신에 비긴 걸로 해. 그럼 갈게."

"뭘 비겨?"

"저번에 너 속인 거. 그거랑 이번 일이랑 쌤쌤 해서 없었던 일로 하자."

"그게 이렇게 덮어질 건수야?"

"안 되겠니 정말?"

"그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너 우리 형이랑 사귄다며?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무슨 후회를 해. 내가 너랑 사귀는 것도 아닌.... 읍"


갑자기 얼굴을 숙여 기습키스를 하는 석찬이. 입을 막고 허리를 끌어안는다. 너무나 놀래서 꼼짝하지 못한 나는, 잠시 후 그를 밀쳐내고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야! 이 XX(삐리리~)야!! 진짜 미친 거 아냐?  미친 XX(삐리 삐리리~)!!!!"


발로 차고, 주먹을 날리고, 가방을 던져 쥐어패는데 한동안 꿋꿋이 맞고 있던 그가 내 손목을 잡는다. 그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해있었다.


"너 석인이랑 그만 만나."

"뭐?"

"그만하라고, 석인이랑."

"네가 뭔데?"

"너 솔직히 말해 봐. 우리 형  좋아해?"

"그래. 좋아해."

"진심이야?"

"응."

"나는? 나한테 감정 있어, 없어?"

"없어."

"진짜로? 하나도 없어? 그럼 네 눈은 뭔데? 너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만 쳐다봤잖아."

"너 왕자야, 왕자병이야? 이 손 좀 놔"

"석인이랑 헤어져. 안 그러면 형한테  말할 거야. 너랑 키스했다고."


"나랑 사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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