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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집개구리 Jan 15. 2016

그녀의 '덫' #2

각자의 기억법

다음 날 오전.

이 집은 계단이 가파른 외부 돌출형이어서, 자칫 낙상의 위험이 있기에, 항상 오르고 내릴 때 주의를 해야 한다.

게다가 계단 중간에 움푹 파인 곳이 있어서, 처음 이사를 와서는  몇 번이나 발에 걸려 넘어지곤 했다.


이젠 적응이 돼서 그런지, 오늘은 제법 여유를 부리며 계단을 내려와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그리고, 무심코  카페테라스를 쳐다보다았는데, 오늘도 그가 있었다.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잔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남자.

그의 우아하고 긴 손가락에 시선이 뺏겨 다보다가 그만, 문턱에 발이 걸려 그대로 바닥에 구르고 말았다.

바닥과 몸이 닿았을 때의 효과음이  '털썩'과 '철푸덕'의 중간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둘 다 포함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아픈 것보다 오히려 소리에 놀라 심장이 멎을 정도였다.

땅바닥이 차갑고 딱딱해서 충격이 더 컸는데, 잠시 후 호흡을 고르고, 몸을 일으키다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긴 다리를 꼬고 앉아 한 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어떡해... 창피해.'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옷에 묻은 먼지를 터는데, 그가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는다.

'뭐야? 웃어? 지금 웃었냐?'

도끼눈을 뜬 채 인상을 쓰고 있는 것도 잠시, 무릎이 쓰라려서 바지를 걷어올렸더니, 무릎에 원형으로 피부가 벗겨져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아...아퍼 진짜....'


나중에 무경에게 그 날 일을 물어봤는데, 그는 아주 시크하게 "몰라, 기억 안 나는데 그런 일이 있었어?"라며 날 더욱 민망하게 했다.

이렇게 사람마다 각자의 기억법은 차이가 있다.




며칠 후, 연습실에서 실기 준비를  하고 있는데, 부동산에서 할 말이 있다며 연락이 왔다.

그래서 운동을 마치자마자 찾아갔더니 부동산 사장님이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했다.


"저기 아가씨. 집을 좀 빼줘야겠어."

"네? 집을 빼 달라니요? 월세도 안 밀리고, 계약기간이 1년 넘게 남았는데, 왜요?"

"그 건물 주인이 이번에 복합단지를 조성하는데   아가씨 살고 있는 건물갤러리로 리모델링할 거래. 그래서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 공사 전에 다 나가기로 했거든. 문제는 아가씬데... 워낙 보증금이 얼마 안 되어서... 다른 집은 한 달 치 월세 하고, 복비랑 이사비용 받고 가기로 했거든. 내가 아가씨 사정이 딱하니까 건물주인한테 말해 볼게. 두 달치 정도는 달라고."

"제가 그 집에 들어간 게 시세보다 싸서 그런 건데, 다른 집 구할 돈이 있었으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겠죠. 지금 그 돈으로 어딜 가서 방을 구해요?"

 "그러니까 알아봐야지. 아가씨도 사정이 있는 건 아는데, 나라고 별 수 있나. 그냥  그쪽에서 그렇게 말하니까 아가씨한테 전달한 것밖에. 그래서 내가 처음에 그랬잖아. 이 집은 싸긴 한데 대신에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비워줘야 된다고."

"그래서 다른데 계약한다니까 사장님이 2년 안에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래, 근데 나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이 일 하다 보면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일이 허다하다고..."


그 말이 맞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중간에서 소개를 해줬을 뿐, 지금 내가 그를 붙잡고 떼를 쓴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래, 알고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답답한 게 있는 거다.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며 부동산을 나왔다.

시험이 한 달 남았다. 아직 실력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아서 불안하지만, 이번에 꼭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그리고 취업을 해서 돈을 만들어 이사를 가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가장 최선인 것 다.




힘없이 집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학교 선배 '조필상'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니? 좀 만나자."


그는 대학 졸업 후,  국립현대무용단에 입단했다.

실력도 인기도 항상 탑이었으며, 2년 동안 내가 짝사랑했던 대상이기도 했다.

3학년 때, 그와 함께 공연할 기회가 있어, 같이 연습을 하면서, 그의 자상함과 유쾌함, 순수에 점점 끌렸다.


그는 과에서 몇 안 되는 남자이자, 훤칠한 외모와, 쾌활한 성격으로 항상 주위에 따르는 여자들이  많았고, 특히 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미소가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긴 시간을 혼자 애태우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고백할 기회도 없이, 졸업 후 무용을 그만두면서 자연스레 그와 멀어졌다.

가끔 동기들에게 소식을 간간이 전해 들을 수 있었는데, 그가 무용단에 들어가 실력을 인정받고, 최근 공연에서도 대성황을 거두었다고 한다.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연락도 할 수 없었다. 왠지 그 앞에서 더욱 작아 보이는 내 자신이 싫었기에.


그런 그에게 먼저 전화가 온 것이다.

딱히 만날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조금은 들뜬 마음에 약속 장소인 연희동으로 갔다.

작은 일본식 로바다야끼였는데,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쪽에 앉아있던 그가 손을 흔들며 나를 반긴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니?"

"네, 선배. 정말 오랜만이에요."

"내가 졸업하고, 거의 2년 만인가? 시간 진짜 빠르다."

"벌써 그렇게 됬네요. 가끔 소식 듣긴 했는데... 이번 공연도 성공이라고... 축하해요."

"응. 고마워."


'호로록' 따뜻한 정종을 한 모금 마셨다.

쌀쌀한 날씨에 움츠러들었던 몸이 금세 따뜻해졌다.


"요새 들어,  졸업 공연할 때가 자주 생각이 나.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고 힘들었는데,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아. 너도 옆에 있었고... 네가 나한테 많이 맞춰주고, 밥 안 먹는다고 김밥도 싸주고 그랬는데... 기억나?"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소소한 그의 손짓과 눈빛조차도...


"무용을 그만뒀다는 얘기를 들었어. 생각도 못했던 일이라... 네 실력이면 당연히 나랑 같은 곳으로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 아니면 유학을 가거나... 지금도 무대에 서는 게 많이 두렵니?"

"졸업하고, 다시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요...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내 길이 아닌 것 같아서 그만둔 거예요."

"아깝잖아.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오랜만에 찾아온 선배는, 나에게 왜 무용을 포기했느냐고 그리고, 왜 극복하려 하지 않느냐고 조용히 묻고 있었다.

나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자꾸  쓴웃음이 났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선배인데, 오늘은 왠지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더욱 그랬다.




그와 헤어지고, 혼자 포장마차를 찾아 곰장어 한 접시와 소주를 시켰다.

한잔, 두 잔... 그렇게 두 병을 비워냈고,  '한 병 더요~'를 외쳤을 때 이미 내 혀는 돌돌 말려 꼬부라져 있었다.

결국 마지막 병을 시켜 반도 먹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걷는 것을 보면 취한 정도를 알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술을 먹으면 몸이 가벼워져서 꼭 날아가는 기분으로 스텝을 밟는다.


'원 투 쓰리~ 다시~ 원 투 원투~' 혼자 흥얼거리며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떠돌이 개와 마주쳤다.

자세히 쳐다볼 새도 없이, 사람을 피해 달아나는 개를 보니 왠지 내 처지와 비슷해 보여 울컥하는 마음에 슬퍼졌다. '으헝... 엄마아....'

훌쩍거리며 집 앞에 도착하였는데, 오늘따라 계단이 너무 높아 보여 차마, 올라가지 못하고, 집 앞 문턱에 쪼그리고 앉아 정신을 좀 차리기로 했다.


그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이봐요. 여기서 잠들면 어떡해요. 일어나 봐요."


눈이 자꾸 풀려서, 미간에 힘을 주어 보니, 아까 카페에 앉아있던 그 남자이다.

그는 멀리 떨어져서 경계하듯 날 쳐다보고 있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다가, 그대로 다시 주저앉고 말았는데 그제야 그가 옆으로 다가와 내 상태를 확인한다.


"집이 어디예요? 사람 불러줘요? 이봐요. 괜찮아요?"

"네? 아니... 아니에요. 우욱...일어날 수...에힛."


분명히 몸을 일으켜 세워 문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해 올려다보니 내가 잡은 건 그의 머리카락이었다. '헉!'

의도치 않게 그의 머리채를 잡고 몸을 일으켜 세운 나는 순간,  당황할 사이도 없이, 그가 급하게 몸을 세우는 바람에 다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무슨 짓이에요? 남의 머리는 왜 뽑고 그래요?"


'어라? 지금 니가 날 밀었냐?' 바둥대는 몸을 진정시키고  다리에 힘을 '꽉' 주어 간신히 일어났다.

그를 제대로 올려다보니, 160이 안 되는 나보다 30센티 이상은 커 보였다.

그렇지만, 그깟 키 차이에 굴하지 않기로 하고,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당신 뭐야? 지금 날 밀었어? 왜 사람을 밀고 그래? 그렇잖아도 오늘 기분 드러운데 너 잘 만났다. 생긴 건 희멀건 게 꼭 말티즈처럼 생겨가꼬... 너 말티즈가 뭔지 알어? 그래, 맞아. 내가 어릴 때 키우던 개가 말티즈였어. 걔 이름이 뭔지 알아? 똥꼬 발랄. 하도 까불고 설쳐대서 이름이 똥꼬라고... 너 똥꼬가 뭔지 알아? 모르지?"


의기양양하게 그의 무지함을 비웃으며, 똘끼 충만한 얼굴로 혼자 계속 떠들었다.


"흑... 근데 그 똥꼬가 어떻게 됐는 줄 알아? 아파서 죽어버렸어. 내가 그렇게 이뻐했는데, 걔때문에 보신탕도 안 먹었는데.... 흑흑..... 나쁜 똥꼬. 날 두고 가버렸어..으헝....!!!! 보고 싶어!!!!"


그때 보았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그리고,  그때 멈추었어야 했다.


"그런데, 너 뭐야? 뭐하는 놈인데, 남의 집 앞에서 어슬렁거려! 도둑이야?"


그리고, 최소한 그에게 삿대질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정체가 뭐냐고 이 똥꼬 자식아."

"당신, 이 건물에 삽니까?"

"그래, 나 여기 산다. 워쩔래~쩌어기~ 위에 옥탑방 보이냐? 저기가 내 집이야. 완전 펜트하우스다? 낮엔 엄청 덥고, 밤엔 엄청 추워. 부럽지? 내가 저 옥탑방에 사는 여자야. 힛힛히. 그러는 넌 뭔데? 뭐하는 놈이야?"


그가 손을 뻗어 주변의 건물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동네의 거의 모든 빌딩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에 있는 건물을 짚으며 말했다.


"건물주."


내 기억은 여기까지 이다. 그리고, 정신을 놓으면서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젠장. 망했다.'




그녀의 '덫'은 연속간행물입니다. 1편부터 보시면 스토리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됩니다.






요새 날씨가 많이 추워요. 곧 봄이 오겠죠? 따뜻한 차 많이 드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이어서 19일에 돌아올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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