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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집개구리 Jan 19. 2016

그녀의 '덫' #3

꿈을 꾼다는 것은

그 일은... 졸업공연을 앞두고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두통이 있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는데, 점점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해졌다.

그리고,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 하면, 악몽을 꾸었고, 언제부턴가 꿈에서 이상한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검은 옷을 입고, 검은 피부와 검은 눈으로 멀리서 지켜보더니, 점점 다가와 원형으로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 안에 갇힌 나는,  겁이 나 달아나려 했지만, 숲처럼 빽빽이 둘러싼 그들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공연 전날, 또 꿈을 꾸었는데...

그중 한 남자가 얼음송곳으로 내 심장을 찔렀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온몸이 땀으로 젖어있었고, 심장을 후벼 파는 듯한 고통에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자,  공연이 벌어지는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주연을 맡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공연을 무사히 마쳐야 한다.

지금까지 했던 데로... 조금만 힘을 내서... 제발.

객석에는 기대에 찬 부모님이 보였고, 다른 자리에는 필상 선배가 흐뭇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막이 오르고,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함께 무대 위에 조명이 켜졌다.

사뿐사뿐 중앙으로 가고 있는데, 객석을 돌아보면서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꿈을 꾸듯, 시야가 흐려졌다.

그러더니 조금 전까지 객석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그곳에는 단 한 명이 중앙에 앉아있었는데,  어젯밤 꿈속에서 날 찌른 그 검은 눈의 남자였다.

음악이 흐르고, 다른 무용수들이 리듬에 맞춰 안무를 하는 가운데, 나는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꼼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자리에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다행히 공연은 계속되었고, 내 대신 주연을 맡은 동기는 그 해 수석 졸업과 함께,  필상 선배가 있는 국립현대무용단에 입단했다.



 

어젯밤, 선배는 나에게 차분하게 얘기했다.


"무대공포증은 너만 있는 게 아니야. 무용가들만 그런 것도 아니고,  '쇼팽'이나 '라흐마니노프'도 마찬가지였데.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이상한 게 아니고,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정상적인 과정이니까 이제 그만..."

"선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죄송해요..."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주하고 있는 내내, 그의 안타까운 표정이 나를 슬프게 했다.

하지만, 나는 그 공연 이후 다시는 악몽을 꾸지 않았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계속 울어대는 벨소리에 몸을 뒤척이다가 눈을 떴는데, 센터에서 온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이 넘었다.

시간을 보니 오전 8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돈을 모으기 위해 센터에서 일을 하기로 했고, 출근시간은 8시이다.

그런데 벌써 30분이나 지각한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급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매니저님 죄송해요. 늦잠을 잤어요. 네... 바로 갈게요. 죄송합니다."


욕실로 뛰어가 양치질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바지를 벗으니 다리 여기저기에 멍이 잔뜩 들어있었다.

이상하게도 술을 마시고 난 다음날에는 몸 어딘가에 꼭 상처가 생기는데 왜 그런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 넘어졌겠지' 옷에 닿은 부분이 쓰라려 아팠지만,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계단을 뛰어내려 1층에 닿았을 때, 불현듯 몇 가지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는데, 너무도 비현실적인 장면들이어서 '그것도 꿈이었나보다' 라고 넘겨버렸다.


그리고, 연습실에서 바닥청소를 하고 있을 때, 부동산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뭐라고요? 집을 빼라고요?"

"아가씨... 나도 지금 연락을 받아서...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암튼 그렇게 전해 달래. 이번 달 안에 당장 집을 비워달라고... 다음 달 초에 그 옥탑부터 철거가 들어갈 거래."


부동산 사장님은 약속이 있다고, 내일 다시 얘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뭐지, 어떻게 하루 만에 방을 당장 빼라고 할 수가 있어? 미친 거 아냐?'

바닥에 주저앉아 대책을 세워 봐도,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러다가, 불현듯 몇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설마, 어제 그 남자?'

이럴 때가 아니다. 다시 벌떡 일어나 서둘러 청소를 마무리하고, 센터를 나왔다.


'탁탁탁!!!' 전속력으로 뛰어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가 카페 앞에 앉아있음을 발견한 난 마치,  곰처럼 포효하며 그에게 달려갔다.




"이봐요!!!!!!!"


그리고, 그의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양 손을 골반에 걸치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쏘아보며 중얼거렸다.

너를 기선 제압하리라!!!

그런데,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난, 깜짝 놀랐다.

그가 날 보자,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는데,  눈 밑에 멍이 시퍼렇게 덮여있었다.

'설마, 저걸 내가? 아닐 거야.'

한결 부드럽게 그를 다시 불렀다.


"이봐요~"

"뭡니까?"


그의 목소리는 잔뜩 날이 서 있고, 차가웠다.


"저 아시죠?"

".......?"

"당신이 나보고 집 빼라고 그랬어요?"

"뭐라고요?"

"당신이 여기 건물주라면서요. 맞아요?"


그가 빤히 쳐다본다.


"내가 어제 술을 좀 먹어서 본의 아니게  실수한 것 같은데. 그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사과할게요. 물론 황당하고, 많이 화가 났겠죠  그쪽 입장에서는... 그래서 먼저 사과한다고요. 내가 잘못한 게 맞고, 실수 인정하고. 진짜 미안해요, 그런데 사실,  그쪽도 그 시간에 거기 있던 게 이상하죠. 난 또 나쁜 사람인 줄 알고, 아무리 건물주라도 그렇지 왜 그 시간에 남의 집 앞에서 어슬렁거려요?"

"나도 여기 삽니다."


그가 손을 가리키니 4층 빌라가 보였다.

당황해서  헛기침하며,


"그래서 어제 일 때문에 나보고 나가라고 한 거예요? 내가 맨 정신에 그런 것도 아니고, 속이 상해서 술 좀먹고, 하필 당신이 그 자리에 있어서 말실수 좀 한 건데. 그렇다고 남자가 쪼~잔하게 집을 나가라고 하는 게 말이 돼요?

"뭐요? 쪼잔?"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그런 거지,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어제 일에 대해선 충분히 잘못을 인정하는데, 집 문제랑 연관 짓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그건 정말 비겁해요."

"내가 지금 잘못 듣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이게 사과하는 사람의 자세입니까? 쪼잔하고 비겁하다고 말하면서 미안하다고 하는 게 당신의 방식이에요?"

"아니, 전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그 일에 대해서 사과할 자세가 되어있는데, 오늘 갑자기 집을 나가라고 하니까 그거랑 이거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려고요."

"그럼, 당신은 지금 나한테 사과하러 온 게 아니고, 따지러 온 거네요. 그런가요?"


뜨끔했다. 보기보다 예리하다. 이 남자.


"난 어제, 내 집에 들어가다가 정신 이상한 여자에게 봉변을 당했어요. 그리고 이 얼굴!"


그가 손으로 자신의 눈 밑 상처를 가리킨다.


"보입니까? 이 얼굴 어떻게 할 겁니까? 내가 오늘 병원에서 진단서까지 끊어놨어요. 당신은 술에 취해 실수였다고 하지만,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인사불성인 상태로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게 더 문제인 겁니다. 그리고, 집 때문에 이러는 것 같은데, 난 감정적으로 일 처리하는 사람 아닙니다. 이 구역 조성건은 개발추진팀에서 진행합니다. 집 문제는 거기 가서 알아보시고요. 어제 일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인 피해보상 및 고소 절차에 대해서는 따로 연락이 갈 테니 기다리세요."

"뭐? 고소? 피해보상? , 진짜 너무하네.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충분히 반성하고 있다고 얘기했잖아요. 어디 부러진 것도 아니고, 남자가 얼굴에 멍이 좀 들었다고 고소를 해요? 당신이야말로 어제 일을 핑계로 날 내쫓으려는 거잖아요. 당신이 건물주면 다야? 뭐 건물주면 세입자한테 자기 맘대로 막 나가라 마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것도 고소 대상이야. 갑질도 범죄라고. 아주 흉악 범죄. 알아?"


그가 조용히 책을 덮고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정신 이상한 여자인 줄 알았더니, 그냥 형편없고 최악이네요 당신."


그리고 잠시 후,  검은 외제차가 카페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의 앞에 멈추어 섰다.

앞 조수석에서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내려 뒷 문을 열어주자, 차에 올라타며 나를 한번 쳐다보았는데, 그 표정은 거의 한심함과, 경멸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가 떠나고, 혼자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뭐? 정신 이상? 최악? 나보고 욕한 거지 지금? 맞지? 아... 진짜 어이가 없네."




씩씩거리며 집으로 올라와 침대에 누웠다.

분이 안 풀려 베개를 쥐어뜯고 있는데, 계속  울리는 핸드폰 진동소리에 메시지를 확인했더니, 부동산 사장님의 문자가 와 있었다.

1시간 전 상황.

-어쩌지? 아가씨. 내가 번지수를 잘못 보고 실수를 했네? 빼 달라는 집이 아가씨 말고, 옆 블록이더라고. 거기가 먼저 추진되나 봐. 내일 안 와도 돼. 미안.-


'헐....'

이건 또 뭐란 말인가.

그대로 핸드폰을 든 채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럼, 오늘 일은 그의 말대로 나의 오해였다는 것인가.

어제로도 부족해서 오늘까지??

아... 정말 최악이다 서예랑.

어쩌지...

술이 안 깨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할까... 아니면 원래 미친 여자라고?

아... 그렇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억..


바닥을 구르며 머리를 쥐어뜯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주워 담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냥 도망가버릴까? 여행가방을 꺼내 열쇠를 풀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털썩.

난 갈 곳도 없다.


부모님은 독립선언을 한 나에게, 자리잡기 전까진 내려오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사 간 새  집의 주소도 알려주지 않으셨다.


그렇게 또, 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은 연속간행물입니다. 1편부터 보시면 스토리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됩니다.






잠이 오지 않을 때에는 따뜻한 핫쵸코나 우유를 드셔 보세요. 발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도 수면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22일에 뵐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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