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령 Apr 02. 2022

프로덕트가 꼬이는 과정에 대하여

대충 반년만에 PM으로 돌아온 소감


- 내가 처음 접한, 어떤 '시스템' 이나 '프로그램' 말고 '프로덕트'는 오토바이를 자동차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해서 자동차를 내놓자는 프로젝트의 연장선이었는데, 실제로는 내연기관 자체가 없고 바퀴만 있는 물건이어서 아무것도 못 했다. 내연기관이 없는데 벤츠 S클래스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하길래 이게 무슨 소리지? 하다가 끝났다. 뭘 분석해주는 물건이라는데 분석이 없구만 뭔 개소리야 같은 상황이었던 거다. 


- 프로덕트는 어떤 개인들의 아이데이션의 총합이 아니다. 프로덕트는 고객이나 시장이 가진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모여, 거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총체적인 해결책을 정리한 결과물이다. 당연히 문제가 앞서야 하고, 문제 안에 포함된 여러 세부적인 문제들에 대한 개별적인 해결책들을 매끈하고 일관성 있게 모아서 하나의 체계로 종합한 것이 내가 생각하는 프로덕트의 본질이다. 


- 프로덕트에 대한 문제는 그래서 그것이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냐 아니냐부터 생각해야 하는 것이고(좋은 해결책이냐 아니냐는 그 다음 문제다), 보이는 것(소위 말하는 와꾸)에서 결정나는 게 아니다. 스타트업의 프로덕트를 둘러싼 문제가 수렁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뭔가 해본 것'의 총합에 가까운 물건들을 프로덕트라고 생각하고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를 다루는 일관성 있고 합리적이며 임팩트 있는 철학의 결과물이 프로덕트다. 코드든 UI든 그런 건 전부 부수적이다. 


- 특히 B2B 영역 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잘 알아야 할(그리고 잘 알고 있는) 지점이 있다. B2B는 B2C처럼 '재미'있는 뭘 만들어서 그냥 유저들이 가지고 놀면 DAU나 MAU를 높여서 투자를 받을 수 있다는 식의 문법이 통하지 않는다(일시적으로야 통할 수는 있지). B2B는 어디까지나 고객의 매출을 늘려주든 고객의 손실을 줄여주든 그 둘이 핵심이다. 이것만 잘하면 화면도 필요 없고 고가용성이니 이런 개념도 없고 그냥 TXT나 XLS 던져주는 데이터 서비스로도 월에 몇억씩 벌린다. 반대로 의미가 없다면 AI를 동원하고 AI에서 삑사리내는 걸 커버하기 위한 또다른 AI를 만들어도 소용이 없다.


- 물론,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프로덕트 인력(그게 프로젝트 매니저든 프로덕트 매니저든 기획자든 요새 말로 프로덕트 오너든 뭐든)들은 '문제' 자체에 집중하지 못한다.  막말로 문제야 C레벨이 정하는 상황이 많고 그게 틀린 건 아니다. 아니 뭐 뭔가를 혁신하겠다고 하면 혁신해야겠지. 그게 실제로 혁신이 되느냐 어쩌느냐는 별개로. 우리는 스잡스도 아니고 이재용도 아니고 요새 욕먹는 노태문도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리얼 월드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대부분 돈 주시는 분들이 정한 문제에 대해서 해결책을 우리가 제안을 하고 그걸 액셉을 시키든 깨지든 하는 상황 아니냐 이 말이다. 결국 문제를 풀라고 시키는 게 아니라 풀어야만 하는 입장인 거고, 그러다 보니 'Solution Discovery'가 'Problem Discovery'만큼 실무단에선 중요한 것이다. 


- 더 현실적인 얘기를 해보자. 내가 정말로 짜증이 나는 상황 중 하나는 무슨 문제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명확하지 않게 느껴지고, 거기에 대해서 '해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문제가 있다는데 그게 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문제인 건지 모르겠고, 해결을 한다는 것도 사실 뭘 해결한다는 것인지 모르겠고, 해결한 결과물이 뭔지도 모르겠는 상황이다. 물론 나도 그냥 직딩이고 주식이 있는 것도 아니니 '뭐 그런 걸로 치지~' 같은 심정으로 바라보려면 바라볼 수는 있다. 무슨 어차피 월급은 나온다 뭐 이런 느낌으로다가. 그런데 남 일일 때나 그렇게 말하는 거지 당사자가 되어 봐라. 


- 뭘 만들라고 한다. 근데 그래서 이게 뭔데요 하면 말들이 빙빙 돈다. 그래서 뭐 억지로 대충 정하고 해보려고는 하는데, 당연히 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물음표만 가득하다. 그래서 팔짱 끼고 생각 좀 해보고 있으면, 지위고하 막론하고 여러 사람이 와서 나도 알고 너도 아는 높으신 분이 그게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궁금해 한다고 사실상의 뭐든 빨리 내놓아야 한다(그런데 그 물건은 놀랍게도 높으신 분이 좋아할 만한 것이어야 하며 비즈니스도 잘 되어야 하고 개발도 되는 물건이어야 한다)는 압박을 넣는다. 물론 나도 통상적인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보긴 한다. 그런데 이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러니까 일이 안 되지. 원점에서 처음부터 되게 진지하게 생각을 해도 될까말까 하는, 그것도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꼬일만큼 꼬여서 골치아픈 사안을 고작 개인 한 명이 머리 싸쥐고 이제 겨우 고민을 한다고 뭐가 되겠냐.. 하긴 고객에게든 투자사에게든 질러놓은 말들이 있으니 뭐 어떻게 할 수도 없을 거고. 


- 사실 정말 궁금한 건 나란 말이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냐를 얘기하려면 일단 이게 뭐냐부터 얘기를 해야 하는데 이게 뭐냐니까? 뭐에 대해서 뭘 해주고 싶은 건데. 고객이 좋아하냐 아니냐 같은 건 그렇다 쳐. 그래서 이게 뭐냐고. 이제 이렇게 가면 뻔히 '뭔가 만들었다' 상황이고 욕은 욕대로 먹게 생긴 거다. 프로덕트 인력들이 흔히 겪는, 일은 앞에서 다 망치고 온갖 것이 필요하다, 논의를 해봐야 한다, 뭔가 결론을 내서 내려줘라 하고 수없이 요구를 해도 제대로 안되다가 일 망하면 실무자 중 마도잡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독박쓰는 거. 물론 이 꼴 될 거 아니냐고 물어보면 그럴 일 없다, 고민해 봐야지 않겠냐, 뭐 이런 식으로 다들 말이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 봐라. 대체 누가 '맞아'라고 말하겠는가? 무슨 사형선고 받는 것도 아니고.


-  자, 국내 스타트업 판(이런 게 실존하는지는 일단 둘째치고) 에서 거의 제일 유명한 모 VC 수장 분이 얼마 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다. 서비스 개발을 하기 전에 그것의 비즈니스 모델로 매출을 내보시라고. 여기에 내 관점 좀 더 붙이겠다. 밑지는 장사는 장사가 아니다. 무슨 시장에 대해서 (손실을 감수하고) 전격전을 벌인다느니 이런 VC스러운 얘기 그만 하고 드라이하게 90만원 써서 100만원 만들어 보자. 그거 조단위로 하면 1년에 1천억원 벌리는 거 아닌가. 아니면 최소한 똔똔이라도 좀 해보자고. 그걸 조단위로 하기 위해 큰 금액을 구해와야 투자를 받는 의미가 있지, 90만원 써서 10만원 받고 50만원 받는 일을 조단위로 하면 그냥 회사 망하는 거다. 특히 B2B는 더 그렇고. 


- 투자받는 얘기 하느라 밥먹으러 가서 제육정식 8천원에 사먹는 상황 생각해 보자.  난 배가 고파. 그래서 밥을 먹어야겠어. 난 입맛이 그냥 한국인이라 제육볶음 먹어야겠어. 그래서 간 거 아닌가. 식당들도 제육정식 제공 원가가 8천원이 안되니까 그거 하는 게 아닌가. 배가 고프다는 것만큼 확실한 '문제'가 어딨는가. 해결 못하면 죽는데. 거기서 맛있거나 가격이 싸거나 둘 다이거나 한 대안을 찾는 게 고객인 거고. 


- 프로덕트도 똑같다. 굳이 독창적인 문제를 생각해 내고(문제를 발견한 게 아니라 생각해 냈다는 것도 킬링 포인트다) 독창적인 뭔가를 만들어야 하는가?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엔 세상 문제는 다 거기서 거기고, 해결책도 다 거기서 거기이며 해결책 중 뭔가가 더 나으니까 그쪽으로 가는 것일 뿐이다. 무슨 테슬라면 모르겠는데, 수명~수십명짜리 스타트업들이 다루는 문제나 그 해결책이 엄청 독창적일 필요는 없다. 프로덕트야 독창적일 수 있는데, 프로덕트가 좋은 의미로 독창적이려면 정말 중요한 문제 하나를 잘 찍고 거기에 대해서 비즈니스적/기획적/기술적으로 정말 예리한 프레임워크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잘 하기 위해' 독창적인 방법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지 다르기만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거다.


- 여기서 또 하나. 문제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걸 '우리가' '적절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는 또다른 문제이다. 너무 많은 스타트업 의사결정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꺼려한다. 컨텐츠 회사면 컨텐츠로 문제를 해결해야 맞고 기술 회사면 기술로 문제를 해결해야 맞다. 짬 좀 먹은 프로덕트 인력들이 항상 Product-Market Fit이 나와야 한다고 말을 하는 게 다 이유가 있다는 거다. 결국 프로덕트는 무슨 천재 개발자가 있다, 무슨 FAANG이나 네카라쿠배당토 출신의 인력이 있다, 대표이사가 샤대 벤처 동아리 출신이다,  시장이 유망하다 이러면 잘 되는 게 아니라 사의 조직적인 수준과 실력이 전체적으로 다 표현된 결과인 거다. 그래서 잘 할 수 있는 걸 해도 어려운 판에, 삼성전자도 뛰어든 모든 문제에 대해서 이길 수가 없는데 무슨 몇십 명 짜리 회사에서 다루고 싶은 것이 왜 이렇게 많냐는 거다. 막상 우리의 핵심이라고 얘기하는 것조차도 답이 안 나오는데. 


- 다같이 일치단결해서 같은 걸 바라봐도 진짜 좋은 거 할려면 힘 많이 들어간다. 뭐 네카라쿠배당토라고 해서 그래서 성공한 거야 아니지만, 걔네는 프로젝트 하나 망해도 그냥 때려치우면 그만이고 걔네의 '망했다' 기준은 우리같은 놈들의 망했다 기준하고는 다르다. 나름 나왔는데 목표 성과가 달성이 안 된 게 얘네들이고, 우리가 망했다는 건 운영 자체가 안 되거나 고객들이 '이걸 어따 써요' 한다거나 아무리 해도 서비스의 흑자가 안 날 것이 분명한 어떤 상황들이 아니던가. 정말 이런 상황들 여러번 겪다 보니 지겹기도 하고, 대충 제안서나 쓰고 보고서나 쓰는 게 더 재밌겠다(아니면 최소한 그냥 컴퓨터가 그거 못하는데요 말하면 되는 상황에 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