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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그 순간을 잊지 않는

- 삶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기억력

by 강호

저는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닙니다. 아니 나쁘다고 해야 할까요. 결혼 초기에는 아내에게 오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결혼기념일을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남편들처럼 결혼기념일이 몇 월 며칠인지는 아는데 당일날 그날이 결혼기념일인 걸 깜빡하는 경우가 아니라 정말 연월일 자체를 정확히 기억 못 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아내의 주민등록번호는 언감생심 기억할 꿈도 못 꿉니다.


요즘은 아들 녀석이 종종 삐칩니다. 아들 녀석의 생일이나 주민등록번호라고 뭐 다르겠어요? 조금씩 틀리게 외웠던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아들 녀석은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떡하니 벌리곤 다물 줄을 모릅니다.


"어떻게 아빠가 아들 생일을 못 외워요?"


이런 비난을 숱하게 받았지요. 지금은 아들 녀석도 제 병적인 기억력 부족을 알기에 삐치는 것보다는 놀림감으로 삼습니다. 제 친할머니나 외할머니를 만나면 아버지 흉을 보는 거죠. 제 나름으로도 그게 참 고민스럽습니다. 혹시 치매가 아닐까 걱정도 됩니다. 가끔 제 주민등록번호나 휴대전화 번호도 못 떠올릴 때가 있거든요. 전화통화를 하다가 통장 번호를 불러줘야 할 일이 생기면 반드시 전화를 끊고 스마트폰으로 제 은행앱에 들어가서 번호를 확인한 뒤에 카톡이나 메시지로 알려줘야 합니다. 불편하지요. 참, 불편합니다.


하지만 정작 기억력이 부족해 제가 곤란한 것은 다른 경우입니다. 바로 ‘처음 만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 때이지요. 아내의 잔소리가 원망스러워 짜증을 부리거나 신경질을 내고 나면 그때서야 아내를 ‘처음 만난 순간’이 떠오릅니다. 그토록 불안하고 선병질적이었던 제가 평온해지고 안정감을 갖게 된 것은 모두 아내를 만났기 때문인데요. 아내가 목발을 짚고 사르트르가 자주 갔던 카페 이름을 본 딴 ‘카페 드 플로르’에 들어서던 그 순간을 잊었기 때문이지요. 그 순간을 기억하기만 하면 감사함이 밀려오는데 말이지요.


아이들 때문에 속상한 때도 있지요. 정말 별 것 아닌 일에 아이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윽박질렀던 적도 있습니다. 교육을 한다는 핑계로 과하게 질책한 적도 있고요. 그러고 나면 그 아이들을 처음 제 양손으로 받았던 때가 떠오릅니다. 하나님이 선물처럼 주셨던 그 보석 같은 아이들을 '처음 만난 순간'이요. 그 ‘처음 만난 순간’ 덕분에 저는 아비로서 책임감이 생겼고 제 인생을 더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었거든요. 그 순간을 기억하면 역시 감사함이 밀려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주 그 첫 순간을 잊습니다. 그리고 교만해집니다. 직장에 처음 입사할 때 가졌던 마음가짐을 잊으면 불평불만이 싹틉니다. 일을 너무 많이 시키는 거 아냐? 내가 회사일은 다 하는 거 같은데 연봉은 왜 쥐꼬리야? 우리 팀장 왜 저래? 입사할 때 느꼈던 그 감사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지요. 내 삶에서 큰 계기를 마련해 준 사람과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을 잊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깔보고 경멸합니다. 첫 순간을 잊은 이의 눈빛은 차갑고 교활하고 탐욕스럽습니다. 제 눈빛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내의 생일이나 아이의 주민등록번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 걱정이 안 됩니다. 스마트폰의 메모앱이나 캘린더앱을 사용하면 조금 불편하긴 해도 충분히 보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사한 사람들, 소중한 사람들을 ‘처음 만난 그 순간’을 잊는 것은 정말 두렵습니다. 그 순간을 잊거나 왜곡하여 감사함과 겸손함을 잃을까 무섭습니다.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지하철 3호선 역이름을 순서대로 외우는 훈련이라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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