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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안 May 11. 2022

방구석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시대는 사건의 총합이다. 사건이란 무엇인가. 사건은 고요한 일상의 벽에 균열을 내는 뜻밖의 일이다. 또한 스크래치처럼 양면성을 가진다. 스크래치는 누군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멋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쓰인다.


그렇다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양면적인 사건은 무엇일까. 바로 사랑이다. 인간이 처음으로 배우는 모순이 사랑이 아닐까.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을 보며 욕을 그렇게 하면서도 리모컨을 못 놓는 이유가 있다. 사랑과 전쟁이 600부작이 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강력한 모순은 시대도 막을 수 없다. 사람이 죽고 사는 전쟁통에서도, 돈줄이 곧 명줄인 자본주의 시대의 가장 큰 재앙이었던 IMF 시절에도, 감염의 불안과 공포를 안고 살아야 하는 코로나 시대에도 살아남은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사랑이다. 그놈의 사랑 타령을 왜 이렇게 길게 하냐면 바로 이 드라마를 소개하기 위해서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IMF 시절의 첫사랑을 그린다. 시대가 낳은 재앙과 같은 사건은 두 사람을 몹시도 괴롭힌다. 준수함의 아이콘(?) 백이진은 재벌집 아들에서 하루아침에 빚쟁이에 쫓기는 신세가 됐고, 꿈 많은 펜싱 소녀 나희도는 고등학교 펜싱부가 없어져 방황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서사는 재밌는 사건이 되는 법. 시대의 사건은 이 둘에게 인생의 가장 큰 사건인 사랑을 선물한다. 잦은 우연은 얽히고설켜 인연을 만들고, 그 인연이 빚어낸 사랑은 서로를 응원하는 동시에 서로를 구원하는 관계로 거듭나게 한다.     


이 드라마는 맑아서 좋았다. 말만 들어도 시원해지는 청춘, 첫사랑, 우정을 맑게 그린다. 진짜로 그 시대에 있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기시감이 들기도 다. 다림질 한 교복에서 나는 풋내가 그리워진다고 할까. 만약 보통 K-드라마처럼 온갖 질시, 반칙, 암투와 삼각관계 등 온갖 불행 종합세트를 미친 듯이 풀어놓았다면 진작에 싫증을 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또 끝까지 봤겠지만. 지독한 모순덩어리.)


물론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뭐랄까. 싸우면서 큰다는 어른들의 말처럼 그들의 갈등은 또 다른 성장으로 가는 길목에 등장한 톨게이트였다. 반드시 거쳐야만 다음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까? 특히 나희도와 고유림과의 관계 그랬다. 처음엔 아옹다옹했으나 나중엔 꽁냥꽁냥 하는 사이로 변했더랬지. K-한국인들은 그렇게 또 우정을 쌓는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첫사랑과 우정의 세트인 청춘을 그토록 그리워하는 것일까. 뻔하다는 걸 알면서도 청춘을 그린 드라마에서 리모컨을 왜 그토록 놓지 못하는 것일까. 미완의 시절이라서? 아니면 처음인 게 많고 서툴렀던 그 시절의 어리숙함과 어색함이 그리워서?


앞서 말한 점도 충분히 있겠지만, 오롯이 첨 겪어내는 성장의 시절이라서 그런 것은 아닐까? 사실 몸과 마음이 함께 클 수 있는 시절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오지 않는다. 그 시절의 청춘은 놀이공원 입장권처럼 그 순간에만 유효한 특권이다. 시간은 영원하지 않고,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 때문이다.


한편으론 아쉬웠다. 희도와 이진의 알콩달콩 첫사랑도 좋지만, 그들의 온전한 성장을 계속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담감을 이겨내지 못하면 성장할 수 없다는 프로 운동선수인 희도의 말처럼 그들은 사랑에도 프로가 될 수는 없었을까? 물론 펜싱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서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던 후배 선수처럼 그들도 사랑의 경기장에서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다. 그 경기의 룰은 원래 그렇다.     


하지만 후배는 펜싱을 그만두기 위해서 8강까지 가는 의지를 보였다. 반면에 희도와 이진은 야반도주와 같은 이별을 택했다. 원래 이별이란 게 그런 것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들의 비겁한 변명 대신 원칙 있는 패배, 이유가 있는 도망을 보고 싶었다. 코트에서 맥없이 기권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부딪혀보고 끝났다고 말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들에게 사랑이 성장으로 가는 다음 스텝이었다면 어떤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사랑의 가장 큰 모순이 이별이란 것을 알지만, 적어도 주인공들이 아름다운 모순을 택하기를 바랐다.


결론적으로 후반전이 아쉬웠지만, 전반전까지는 잘 봤다. ‘네가 뭐 작가도 아니고, 평론가도 아닌 주제에 이렇게 떠들어?’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다만 방구석 시청자로서 개인적인 의견을 밝혔을 뿐이다. 대단한 필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랑에 능숙한 이도 아니다. 멀어졌을 때 다시금 애뜻해지는 청춘을 그리워하듯이 시간이 오래 지난 뒤에 남기는 일기다. 첫사랑의 뜻밖의 소식에 약간 심란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이 드라마는 두 번은 못 볼 것 같다. 마치 첫사랑처럼. 안녕 내 스물다섯, 스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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