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일 Aug 27. 2021

야수같은 너를 느껴

내가 어렸을 때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성은 늘 두 명이었다. 나쁜여자와 그렇지 않은 주인공. 신기한 건, 주인공의 사랑과 성공을 방해하는 악녀들은 항상 야망을 품고 있는 여자들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늘 주인공이 아닌 나쁜 여성에게 끌렸다. 본능적이랄까. 착하고 예쁘고, 그래서 남자주인공의 선택을 받는 주인공의 삶은 지루했다. 악녀의 귀결은 늘 파국이었지만, 자신들의 야망에 솔직하고, 그 야망을 쫓는 에너지를 나는 동경했었던 것 같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여성. 그녀들의 결말은 늘 파국이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위탁된 평화보다는 내 스스로 이루는 지옥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일을 하는 여성을 이야기하면, 그 이야기의 끝은 늘 결혼이거나, 출산이거나, 경력단절로 이어진다. 여성에게 일을 빼앗는 것은 세상의 무엇보다 쉬울 것이다. 나는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계속 일해야 하지만, 사실은 나도 마흔, 그리고 쉰의 삶이 잘 상상되지는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세상을 가질 수 있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되뇌이지만 정작 그것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 나는 알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얼마 전 인사발령이 있었다. 대표이사의 임기가 연장되었고, 그에 따라 본인의 목표를 함께 이루어갈 사람들을 팀으로 구성하는 발령이었다. 거기에 내가 포함되리라고는, 사실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조직에서 일정부분 계속 튀고 있다. 누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급속 승진’ 테크를 타고 있는 건데, 사실 나는 얼떨떨하다. 지금 모두가 나의 연기에 속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나는 아직도, 여전히,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두렵고 불안하다. 내가 이 과업을 제대로 완수해 낸다면 나의 가장 빛나는 커리어가 될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의심스럽다. 내가 그 역량을 가지고 있는 걸까. 나는 자꾸 무언가를 원망하고 싶다. 그리고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나는 계속 해명하고 싶다. 너희들이 지금 속고 있는 거라고. 제대로 된 판단을 못하고 있는 거라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최대한 안전하게 가고 싶으니까. 다시 고통스러운 실패의 값을 치루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나는 더 높이 가고 싶다. 나쁜 여성들을 동경하며 그려왔던 자리는 여기보다는 높았다. 나에게 야망이라는 것이 있었던 걸까. 이토록 생경한 야망. 나는 왜 지금, 이 야망을 불안해하는 걸까.

‘네 주제를 알아라’는 말은 늘 나의 의심에 증거를 만들어주었다. 주제도 모르고 나대다가 고꾸라지는 것이 죽음보다 두려웠다. 사실 자기 객관화가 잘 안 되는 유형이기도 해서, 저 말은 나의 불안과 의심에 늘 좋은 먹이를 주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저 말을 모른 척 하기로 했다. 과거의 주제는 현재의 주제와 다르다. 네가 알았던 주제와 지금 나의 주제는 다르다고, 나는 또 뒷걸음치려하는 나의 발을 지금 여기에 겨우겨우 붙들어 둔다.

어떤 역량이 있어서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역량이라는 것은 부딪히고 깨지는 동시에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싶다면, 더 이상 피할 곳은 없다. 분명히, 나는, 여기에서 멈추고 싶지 않다. 누구도 나에게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알려주지 않는다면 이제 스스로 알아가야 한다. 내 안에 뿌리 깊은 의심과 검열 대신,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야망으로 가득 찬 야수를 불러일으켜야겠다.


야수같은 나를 느껴,

NEXT LEVEL,

널 결국엔 내가 부셔.

매거진의 이전글 절반의 세상에서 행복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