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하지 못한 아이들, 기회를 주는 사회
소년사건을 하면 할수록 소년범죄에 너그러워진다.
부모도 아이를 선택할 수 없다고는 하나, 부모는 임신출산이라도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태어나는 아이에게는 존재의 출발점에서부터 아무 선택권이 없다.
어떤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폭력을 배우고, 사랑받기를 포기하는 관계를 배운다. 한 번 뿐인 인생에서 겨우 열 몇 살에, 제일 처음 만난 인간들의 작은 그릇을 깨닫고 받아들이고 그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배우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성숙하는 것이 어떻게 쉽겠나. 많은 아이들이 가해자가 되기 전에 가정 안에서 피해자의 자리를 경험한다. 너무나 많은 소위 '비행'이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이는 아이들에게 낙인이 된다.
제도가 아무리 아동들을 겹겹이 보호하려 하여도 보호자, 특히 부모의 영향력을 이기기 어렵다. 친권박탈이나 격리에도 한계가 있고 외부의 어떤 개입도 부모보다는 필연적으로 늦다. 어떻게 어린 나이에 이런 잔혹한 일을, 싶은 경우에조차도 그 보호자를 보고 가해자가 된 아이를 다시 돌아보면 그저 가엾을 때가 있다. 그것밖에 배우지 못하고 그것밖에 보지 못한 어린 존재들. '어떻게 어린 나이에 이런 잔혹한'이 아니라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힘든 상황에서 다른 길을 찾지 못하고)이런 잔혹한 일을'일 때가 분명 있다.
인내도 배려도 양보도 배워야 알 수 있고 주변에서 보여야 안다. 자신이 보호받아 보지 못했는데 남을 보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성인에게도 대단히 어렵다. 열 몇 살이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어떤 아이들은 보호자 없이 자란다. 어떤 아이들은 약한 보호자 밑에서 자란다. 어떤 아이들은, 나쁜 보호자 밑에서 자란다.
그리고 다 자라지 않은 사람에게 누군가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불량청소년을 선도하겠다며 112에 신고하는 어른, 한밤중에 소란 피우는 아이들을 경찰이 올 때까지 따라다니며 잡고 있는 용감한 목격자가 있다. 아이들에게 세상 무서운 줄을 더 늦기 전에 가르쳐야 한다며 소소한 절도를 끝까지 용서하지 않고 고소한 고소인도 있다. 그런 정의감과 용기, 고집도 세상에는 분명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소란과 혼란과 피해와 정의감의 다른 한편에는, 마지막까지 아이들을 먼저 보호하려는 사회, 그래도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제도, 조금 더 성숙할 틈을 주는 시간, 다 사실이 아니다 싶은 아이들의 말도 추궁하지 않고 그저 끝까지 들어주는 어른도 있어야 한다.
나는 이 둘이 서로 반대편이 아니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