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를 찍었다

쿠알라룸푸르의 비 오는 날

by 리나

이곳에 오기 전 나는 쿠알라룸푸르가 무척이나 덥고 습해서 힘들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주 쾌적하다. 물론 이곳에 온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심지어 6월부터 8월이라는 건기만 경험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써도 될까 싶긴 하다. 지금까지 경험한 쿠알라룸푸르의 날씨는 이렇다. 한낮의 땡볕 아래선 오래 버틸 수 없을 만큼 덥지만 그늘이 있는 곳에선 나름 시원하다. 한국의 여름엔 아침에도 밤에도 덥고 습해서 고생하는 것과 다르게 이곳에선 이른 아침과 밤엔 선선할 때가 많다. 추울 때도 있어서 이불을 꼭 덮고 자야 한다. 그리고 비가 자주 오지만 짧게 쏟아질 때가 많다. 특히 저녁 4시에서 5시 사이에 자주 내렸다. 비가 올 거 같은 날에는 더 즐거운 마음으로 산책을 나가게 된다. 검은색 구름이 조금씩 보이고 바람이 조금 불 때 밖에 나가면 시원하고 쾌적해서 아이들과 뛰어다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바람이 불땐 가만히 있어도 비눗방울이 줄줄이 만들어진다. 애들도 신나고 나도 신나는 순간이다


무엇보다도 비 올 때가 신비롭다. 신기하다보다 신비롭다는 단어를 쓴 건 천둥, 번개를 이만큼 자세히 듣고 본 적이 없어서다. 비가 짧게 내릴 때도 길게 쏟아질 때도 번개의 하얀 섬광과 천둥의 울리는 소리를 자주 경험할 수 있다. 남편이 이곳에 오자마자 여기서는 번개가 옆에서 친다며 강조를 했는데 정말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치는 것처럼 선명하게 볼 수 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천둥, 번개를 이렇게 놀랍게 느낄 줄 이야. 한국에서도 당연히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선명하게 자주 본 적은 없다. 방안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번쩍인 다음 엄청난 소리로 쾅하며 천둥이 치는 것에 매번 놀라워하고 있다.

빛이 소리보다 빠르다는 진리를 체험하는 건 정말 신비롭고 재밌다. 비가 쏟아지는 날, 하얀 섬광이 번쩍이면 쾅 소리가 나기를 두근거리며 기다린다.


어제는 오랜만에 하루 종일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남편이 출근해서 저녁 약속까지 있었던 날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아빠가 없어서 무척 심심해했다. 방안에만 있어도 가끔 왔다 갔다 하며 만나는 아빠가 없으니 기운들이 쭉 빠져있었다. 특히 둘째는 어찌나 아빠를 찾던지 19개월짜리에게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냥 주말에 재밌게 놀자며 달래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데 비까지 하루 종일 내리니 애들은 나한테 딱 붙어서 놀아달라며 보챘다. 심지어 천둥소리가 무섭다고 둘 다 내 무릎에 앉아있겠다고 하거나 혼자서 잘 가던 화장실도 같이 가자고 하는 통에 셋이서 한 몸처럼 붙어있어야 했다. 아이들의 심심함에 나까지 쳐진 건지 나도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팔다리가 욱신욱신 아프기까지 했다. 설마 비 온다고 아픈 건가, 내가 벌써 그런 나이인가 싶어서 살짝 우울해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둡고 쳐진 분위기가 내가 번개 사진을 찍으며 완전히 바뀌었다. 너무 자주 치길래 잘하면 휴대폰으로 찍을 수 있겠다 싶어서 카메라 셔터를 누른 순간 번개가 치며 성공한 거다. 번개 사진 찍었다며 호들갑 떠는 나를 보며 첫째도 덩달아 신나 했고 둘째는 그냥 신나 졌다. 결국 우리는 번개 사진을 보고 또 보며 조잘거리다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비오는 날 내 무릎은 무겁다


쿠알라룸푸르 건기는 끝났다. 9월부터 12월까지는 우기라고 한다. 우기에는 비가 얼마나 더 많이 올까? 그럼 천둥, 번개도 더 자주 볼 수 있을까. 내가 집에만 있어서 많이 심심한가 보다 이 나이에 번개 치는 걸 기다리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