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현규 Aug 03. 2016

감추다

<속이 깊은 주머니>


교양수업으로 패션에 관련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제 주머니가 깊은 바지는 촌스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더운 여름이라 깊은 주머니를 포기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고집을 부리고 싶어져 그 길로 정말 깊은 주머니가 달린 바지를 사버렸다. 패션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어도 주머니에 소지품을 불룩하게 넣어서 다니는 모습이 보기 안 좋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서 내 주머니는 자꾸만 쓸모를 잃었다. 손이라도 담아보고 싶어서 고작 엄지손가락의 한마디 정도 넣어봤지만, 그것마저 더워서 금방 빼버렸으니, 나의 여름은 그렇게 시름시름 깊어 갔나 보다.


언젠가 만나던 애인이 여름이 좋은지 겨울이 좋은지 물어봐서 나는 그저 여름이 싫다고만 말해줬다. 그 뒤로 여름의 뒤통수가 보이는 계절부터 사랑하기 시작해 정확히 여름에 헤어지고 많이 울었다. 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내 슬픔은 노출되고 박제됐다. 숨고 싶었다.


나는 갈수록 여름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깊어간다. 어쩌면 기껏해야 손목 정도 감추는 것으로 여름의 광범위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


눈물인지 장마인지 포르말린 용액인지 모를, 여름으로부터 촌스럽고 겁이 많은 낯짝을 감출 방법도 모르겠다.


나는 여름이 아닌 계절에 손을 깊게 찔러놓고 고개 숙여 걷는 버릇이 있다.


작가의 이전글 내버려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