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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야말로 글쓰기를 익히기 유리하지

by 현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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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글쓰기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어. 돌이켜보면 한두 번의 계기는 아닌 것 같은데...

초등학교(그땐 국민학교) 5학년 때였어. 할아버지가 별세하셨어. 가을이었고. 나는 파란 잠바를 입고 있었는데 오전 일찍 귀가조치되었지. 집으로 돌아와 보니까 집엔 아무도 없는 거야. 그래서 집에 하나밖에 없는 책상에 앉았어. 주로 너희들 고모가 빌려온 책들이 꽂혀있었어. 큰아빠의 책은 없었던 걸로 기억해. 나는 거기 앉아서 몇 권의 책 중에 이병주 선생이 쓴 '지리산'을 쓰윽 읽어봤다. 재밌더라. 아마 그날부터 아빠는 소설가의 꿈을 꿨을 거야.(알다시피 아빠는 아직 제대로 된 소설가는 아니다만) 중학생 시절에는 인기가 많았던 이문열 선생의 소설을 여러 권 읽었어. 그리고 황석영 선생의 대하소설도 읽고. 그 시절엔 읽는 게 다였지. 써 봐야 서너 줄 쓰고 말았을 거야. 그러던 어느 미술 수업시간이었어. 여름이었던 것 같고. 미술 선생님이 시집 한 권을 주셨어. 수업 중이었고 아빠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뒷춤에서 시집을 툭 하니 내미시는 거야.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집 '불과 얼음'이었어. 선생님이 책을 주셨으니까 열심히 읽었지. 책도 참 예뻤어. 나중에 돌려드렸는데 돌려드리지 말 걸 그랬다. 지금도 그 시집은 재출판되고 판매되고 있지만 옛날만큼 작지도 예쁘지도 않은 책이 되어버렸어.

고등학교에 진학했어. 담임 선생님이 가정방문(아빠가 학교 다닐 때 이런 게 있었어. 학교 선생님이 학생들 집을 둘러보는 거야.)을 한다는 거야. 우리 집 방문을 마친 다음 나는 선생님을 다음 방문할 아빠 친구인 민영이네 집으로 모시고 갔어. 그런 다음 좀 먼 곳으로 가정 방문을 가야 했는데 해는 벌써 지고 있었거든. 그래서 민영이 아버지께서 우리 모두 차를 태워서 20분 정도를 달려서 다음 가정방문지로 갔어. 선생님이 볼 일을 보시는 동안 나머지 셋은 족발집(태어나서 처음 가 본)에 족발을 먹으면서 기다렸어. 민영이 아버지께서 물어보시는 거야. 넌 꿈이 뭐꼬? 하고 물으셨어. 예,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갑자기 그렇게 대답을 해버렸네. 소설가라고 하긴 좀 부끄러웠나 보다.) 했어. 수첩 꺼내 봐. 예? 기자가 되고 싶다면 늘 수첩과 볼펜을 가지고 다니면서 메모를 해야지.

아빠는 아빠를 다시 돌아봤어. 아... 메모. 나는 정말 소설가/기자가 되고 싶은 걸까?

대학에 와서 아빠는 국문과 사학과 수업을 몇 가지 들었어. 전공인 철학 수업도 조금 열심히 들었지. 그래도 국문과 수업(특히 고전문학)에 애착이 컸지. 군대를 다녀왔더니 학교에 문예창작학이라는 전공이 생겨있더라. 그래서 가을학기에 문창과 수업을 한 가지 들었어. 그리고 역사적인 그날, 문창과 수업인 문예사조사 중간고사날이었어. 시험문제는 문예사조 서술하라는 거였고 아빠는 별생각 없이 8절지 앞면과 뒷면을 가득 채웠어. 한두 주가 지나고 담당 교수님 호출이 있었어. 자네 문학비평 해 볼 생각 없나? 교수님은 연구실 벽면의 몇 가지 소설책을 꺼내시며 읽어보고 비평해 보겠냐고 물으셨어. 그 후에 한두 번을 더 부르셨어. 마지막 호출 이후에 이르러서 아빠는 문학비평이라는 걸 쓰기 시작했고 그 해 겨울 비평가로 등단했어. 요컨대 책 읽기를 조금이라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문학 사학 철학 수업만으로도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글을 쓸 수 있는 운이 따를 거야.


너희들 학교에서 수강할 수 있는 문/사/철 인문학 수업을 들어봐. 인문학적 지식만으로도 글의 소재는 이미 성립이 된단다. 대학생이야말로 글쓰기를 익히기 유리해. 다음 학기 수강신청할 때 고려해 봐. 특히 역사와 철학 수업은 글쓰기 말고도 인생을 풍요롭게 해 줄 거야. (건축사나 디자인 수업, 또 색채론 같은 것도 재미있을 거야.)

명심해. 글쓰기의 근본은 인문학에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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