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았던 작품들을 중심으로 이야기 1편
지난 토요일, 광주 비엔날레 전시관에 다녀왔다. 그간 현대미술 전시를 여러 나라에서 보았는데, 작년에 바르셀로나에서 들렀던 MACBA가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특히 2023년 9월에 봤던 MACBA 특별전시 중에 Nancy holt라는 작가의 작품이 좋았다.
그 당시, "one sees oneself seeing"이라는 작품 설명의 문구에서 한참을 머물렀었다.
1년 전에도 지금도 비슷한 고민이지만, 결국 나는 나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본다는 것, 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계속되는 의문이 있었고 떼어내지 못할 한계라고 느끼곤 한다. Nancy holt의 작품은 전시장에서 머무르지 않고, 바다에서도 거대한 부지에서도 이어진다. 작가가 보여주는 시선에 확장이 내게는 또 다른 문을 열어준 것 같았다.
작가는 자연의 흐름 (일출, 일몰, 별자리)을 철저한 계산에 넣은 작업들을 1970년부터 해왔다. 닫힌 것에서 열린 것으로 이어지는 시선의 확장 아니면 애초에 닫힌 것일수 없는 인간에 의식과 숙명이었을까. 숙명은 눈 앞에 닥쳐오는게 아니라 잠을 자고 있는 사이 머리맡에 와 있는거라 더 고약하다고도 하니까.
나는 내가 되고 싶은것을 보고, 읽었던 것을 보고, 예술 앞에서 제멋대로 군다.
현대미술이란 그래서 더욱 재밌고 흥미로운 장르로 느껴진다. 정형화된 해석을 거부할 수 있으니까.
이를테면 전통회화에서는 정형화된 해석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항상 답이 정해져 있는 것과 찾기 나름인 답을 고르라면 언제나 후자를 선택할 것 같다.
아무튼 서두가 길었고. 이번 2024 광주 비엔날레에서 봤던 작업 중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작가들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광주 비엔날레는 시의성을 가진 현대미술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올해는 <판소리-모두의 울림>이라는 주제로 지금 시대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2016년 광주비엔날레의 주제는 <제8기 후대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 였는데, 15회-30년이라는 시간 동안 예술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치열하게 묻고 보여주는 작업은 대단하고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은양 도슨트 님의 해석으로 주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폭넓은 설명 덕분에 더 즐겁게 볼 수 있었다. 도슨트 님의 해석, 그리고 도록의 작가의 말과 제가 가지고 있는 관점까지 버무려 보고자 한다.
조은양 도슨트 님이 안내했던 투어에 기안 84, 한혜진이 참여한 적이 있는데, 이때 한혜진이 작품에 원숭이가 연예인과 닮았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강하게 기억에 남았던 작품이다. 도록에 실린 작가의 의도를 가져와보자면 이 작품은 '백인 우월주의가 흑인 수행의 구성에 미치는 영향을 물리적, 개념적으로 다루고' 있다. 백인 우월주의가 있는 한 흑인의 수행성은 완전할 수 없다. 오랜 노예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백인이 사회적, 경제적 권위와 권력을 독점하는 상황에서 흑인이 그 자신으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이런 뒤틀려진 위치성을 원숭이가 나무를 오르는 행위와 그 엉덩이를 바라보는 우위를 점한 대상을 분리하는 작업으로 표현한 것이다.
위에 두 작품도 흑인이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데, 폭력이 드러나는 작품은 평면에서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반면, <빛이 보이나요>라는 작품에서는 구겨지고 접혀서 단번에 파악되지 않는 형태로 대비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들을 기억하고 싶은 이유는 흑인이라는 주어를 다른 약자로 바꾼다고 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는 사회구조가 연상되기 때문이었다.
작가의 인터뷰 중에, 인상 깊었던 표현을 옮겨본다
"나는 혼돈이 지배적인 구조를 와해하고 그 결과 탈바꿈시키는 역할을 할 때 해방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인터뷰를 읽고 작업을 반추하면 더 흥미롭게 읽히는 지점이 생긴다.
작가 인터뷰를 보지 않고,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때 이게 뭔가 한참을 생각했다.
제목은 상속녀고, 돌이 담긴 포대를 부러 끌고 와서 쏟아버리는 상황이라니? '와해'라는 단어를 덧입혀서 이 작품을 본다면, 상속을 거부하는/ 해체하는/ 무너트리는 작업으로 볼 수 도 있다. 예술에서 의도된 상충과 모순에서 발생하는 생각의 틈은 언제나 흥미롭다.
도슨트 님께서는 이 작품을 어디에도 자리가 없는, 소외된 현대인을 표현한 거라는 해석을 해주셨다. 텅 빈 공간에 앉을자리도 없고, 천장마저 위태롭게 쏟아져 내릴 듯한 구성은 작가가 상정한 공간-전시라는 특정된 장소였든, 아니면 도슨트 님의 해석대로 확장된 사회에서의 인간의 불안으로든-이 철저하게 막혀있다는 뜻일 거다. 시간과 공간에서 간(間)은 사이를 의미한다. 자리가 없다는 건 결국 끼어들 사이, 틈이 없거나 사라져 감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인다. 좀 더 넓은 시선으로 본다면 계층/ 계급 간에 이동이 어려워지는 사회구조, 심화되어가고 있는 부의 분배로도 해석해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뭔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정확히 반대편에 나란히 위치한 것, 놓여있는 것을 봐야 할 때가 있다. 없음을 이야기한다면 정확히 지금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할 필요도 있다.
생각나는 대로 글을 적어봤다. 아직 쓰고 싶은 작가들이 10명 넘게 남았는데 올해까지 천천히 일기 겸 고민을 정리하는 겸해서 써보겠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