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템플스테이를 다녀왔다.
방학이 끝나가기 전에 새로운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지만 딱히 특별히 하고픈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친구들 몇 명에게 "3-4일 정도 여유가 생긴다면 하고 싶은 것"을 추천해 달라고 물었고, 돌아온 답변들 속에서 '템플스테이'에 꽂혔다.
산도 좋아하고, 절도 좋아하니 템플스테이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찾아간 금정산의 범어사.
신라 시대에 창건한 '천년고찰'이라고 한다.
템플스테이를 위해 머무는 공간은 절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새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새벽 예불에 참석하려 새벽 4시에 걸었던 산길은 낮에 걷던 길보다 더 멀게 느껴졌지만
빛도 사람도 없는 산길 속에 내 발소리만 들으며 걷다 보니 조용한 절이 등장했다.
대웅전에 가까워질수록 목탁소리가 가까워졌다.
곧 북소리가 들려왔다.
부처님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축생들을 위해 북에 부처님의 마음을 싣는다고 한다.
고요함을 천천히 두드리는 저 소리가 인간을 위한 것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매일매일 쉬지 않고 깜깜한 새벽에 산속의 다른 생명들을 위해서 울려 퍼진다는 것이 참 아름다웠다.
예불도, 새벽 예불도 처음이었다.
스님들과 다른 분들을 따라 절하고, 일어나고, 스님들의 목소리를 듣고 불상의 표정과 대웅전의 어둑한 공기와 향 속에 어색하게 머물렀다.
그러다 내 앞에 앉아 계시는 분이 울고 계시는 걸 깨달았다.
그분을 여기에 오게 한 간절한 무언가는 새벽 4시에 깊은 절을 찾아오게 만들었고, 그렇게 울게 만들었다.
그 간절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불상의 표정까지 하나의 장면처럼 새겨졌다.
그저 호기심에 찾아온 예불이었지만, 가만히 그 공간에 있다 보니 생각이 천천히 움직였다.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던 어지럽고 나쁜 생각들이 위로 떠올랐고, 불상은 미소 지으며 내 부끄러운 생각들을 지켜보는 듯했다.
구겨진 채 버려진 마음들을 제대로 지켜보는 것이 이런 시간일까.
이런 것이 종교가 주는 평화일까. 아주 작은 실마리를 얻었다.
마지막 명상 시간, 스님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말했다.
숙소에서 읽은 책에서도 모든 것이 내 안에 있고 내가 답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너무 당연해서 자주 잊는 것.
범어사에 들어서는 두 번째 문은 ' 不二門'이다.
답은 두 개가 아니다. 세상은 너-나, 안-밖, 진실-거짓과 같은 이분법이 아니며 모든 것은 하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라고 했다.
항상 누군가를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타인을 미워하면서 내 밖에 있는 것과 내 안의 있는 것의 경계를 긋지만 사실 모든 고통이나 근심이 결국 그 경계를 긋는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간결하게 전한 이름 같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경계를 긋기보다 내 안에서 답을 찾으려 노력하게 되겠지.
새벽의 북소리, 누군가의 울음, 불상 앞에서 떠오르던 어지럽고 나쁜 마음,
내 안에 답이 있다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말이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위로가 되어주고 있다.
무언가를 믿는다고 말해본 적이 별로 없다.
신을, 종교를, 타인을 그렇게 전적으로 믿은 적이 없다.
아직까지는 조각조각 울림을 남기는 작은 실마리들을 모아 내 안에 연결해 가는 단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