땐뽀걸즈_선함의 면역력

by 램램

포스터에서 느껴지는 맑은 활기 때문에 보고 싶었던 영화, <땐뽀걸즈>는 상영 막바지가 돼서야 출장으로 간 서울에서, 홍대 거리를 질주한 끝에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질주가 후회되지 않았던, 나에게 투명한 에너지를 준 영화이기도 했다.
거제여상의 댄스스포츠반 학생들과 지도교사의 이야기. 우승을 위해 피땀흘리는 흔한 청춘영화가 될 수도 있었지만, 시절과 지역, 아이들이 겪는 어두운 단면들은 보여주면서도 그 어둠에지지 않겠다는 듯이 활기찬 소녀들의 몸짓과 목소리로 영화를 매듭짓는다. 그래서 더 좋았다.

세상에 나쁜 사람이 절대적인 숫자가 더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많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뉴스에서도 항상 나쁜 이들을 소개하고,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도 나쁜 사람들이니까 그들의 존재가 더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와중에 한명이라도 선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나쁜사람들의 영향을 가벼이 털어낼 수 있게 된다. 땐뽀걸즈를 보면서, 단 한명의 선한사람을 만나는 일에 대해 생각했고, 땐뽀반 이규호 선생님의 선함이 8명의 소녀들에게 전했을 그 면역력에 대해 생각했다.

초등학교 3학년, 나는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었다. 당시에는 왕따문제가 요즘처럼 심각하진 않았어서, 그냥 가벼운 따돌림 정도라고 표현하는게 맞겠다.
처음부터 날 해코지하는 아이들이 있던 것은 아니고, 그냥 같은 반에 친한 친구가 없었다. 조용했던 성격이라 혼자 점심 도시락을 먹고, 조용히 있다가 다른 반의 가장 친한 친구와 하교했다.
그냥 그렇게 조용히 지내다가 조용한 친구 몇 명 사귀고 평화롭게 졸업했을 수도 있었을 거였다.

3학년 7반 담임선생님은 50대의 남자선생님이셨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발표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어서, 선생님의 질문에 손을 들고 대답하면 반 전체가 박수를 치게 했다.
어느 날 국어 시간이었던가, 모두가 대답을 못하는 문제 하나가 나왔다. 그전까지 단 한 번의 발표도 하지 않던 나였는데, 그날따라 교과서 속 정답이 보였다.
침묵속에서 한참 고민하다가 용기내어 손을 들었고, 처음으로 반 전체에게 박수를 받아봤다. 의외로 무대 체질이었던 나는 그 순간이 너무 짜릿하고 좋아서, 매일매일 열심히 예습해 발표도 곧잘 하면서 교실에서 주목받게 되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교실이란, 모두에게 당연스레 사랑받는 학생이 있는 법이다. 그 아이의 눈에 거슬렸던 나는, 그녀와 그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꽤 적극적인 따돌림을 받았다. 뭐 그래봐야, 짓궂은 남학생의 놀리기와 뒷담화, 째려보기 정도의 괴롭힘이었지만.
예전과는 달리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낯설고 힘들었다.
선생님 눈에도 그 상황이 눈에 띄었나 보다. 혼자 웅크리고 앉아 밥먹는 아이. 그때부터 선생님은 점심 도시락을 교실에서 드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옆에 나를 앉혔다. 안그래도 맘에 안드는 애가 선생님과 점심까지 먹으니, 그 친구는 더 분노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계속 나와 점심을 먹었고, 얼마 지나서는 다른 친구들도 같이 불러 밥을 먹었다. 그 사이 나의 성적은 쑥쑥 올라 반에서 1등을 했는데, 그날 한바탕 그 친구의 통곡 퍼포먼스가 있었지만, 그 이후 나를 대하는 반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를 따돌리던 아이들이 자신들의 무리에 끌어들였고, 1학기까지만 해도 점심시간에 혼자서 사육장에 쭈그리고 앉아 토끼에게 풀을 주던 아이였던 나는 2학기 학급 부반장으로 뽑히게 된다. (반장은 아마 남자아이였던 것 같다). 써놓고 보니 되게 그럴듯한 해피엔딩 거짓말 같지만. 정말 내게 있던 일임을 밝혀둔다.

<땐뽀걸즈> 를 보면서 그 선생님이 떠올랐다. 내가 왕따를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누군가 나를 믿어준다는 사실과 끊임없이 더 잘 할 수 있다고 말해준 선생님 덕분이었다. <땐뽀걸즈>에 등장하는 친구들 중 왕따는 없었지만, 혼자서 꽤 많은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던 현빈이라는 친구가 있었다.현빈이는 매일 알바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지만, 땐뽀반에 들어간다. 선생님이 현빈이를 믿어주었고, 잘 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엇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보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다.

내가 지금 어떤 사람이건, 괜찮을 거라고 믿고 다독여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자신을 가둔 어둠 속에서 딱 하나의 빛만 있어도, 그 어둠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선한 사람 한명이 나에게 주고 가는 보호막, 면역력 같은 것이랄까. 땐뽀걸즈는 영화로서도, 다큐멘터리로서도 복잡해질 수 있는 작품이었다.
자칫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피나는 연습을 통해 은상 수상을 일궈내는 성공 스토리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상한 관점을 선택하지 않아서 좋았다. 거제란 도시에 드리워진 그늘, 딱히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 친구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 보다는 그들이 춤을 추며 맘껏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연히 행복해야 하니까. 더 많은 소녀들이, 더 많은 어린 친구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쁜 세상과 나쁜 사람들 사이에서 한숨나오는 날들도 있겠지만, 선함의 면역력을 가지고, 계속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선한 어른이 되어주고 싶다.

_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 속 주인공은 나와 담임선생님이었다.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준 용기로 스스로 새로운 나의 유년기를 만들었다고 믿어왔었다.
그런데 아주 최근에서야 엄마 또한 나몰래 나를 위해 노력했었다는 걸 알았다.
당시 엄마는 집에서 방과 후 학습교실을 하고 있었는데, 딸아이가 학급에서 왕따를 당한다는 걸 알고는 그 따돌림을 주도한 아이엄마에게 찾아가, 자신이 그 아이를 가르칠테니 집으로 보내달라 했다고 한다.
그 이후 그 아이를 포함해 아이들 몇 명이 함께 우리집에서 나와 함께 엄마와 함께 공부했고, 자연스럽게 친한 사이가 되었다. 내 기억 속에선 내가 왕따를 벗어나고 나서야 그 친구들이 등장했는데, 그보다 앞서 엄마는 나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에게 내가 받은 건, 나의 존재에 새겨진 어쩔 수 없는 사랑과 보살핌 같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볼드모트가 해리의 몸을 만지지 못하게 지켜주던 해리 엄마의 사랑 같은 것 말이다.
엄마와의 관계, 엄마와의 사랑에 대해서는 좀 더 긴 얘기를 풀어놓아야 할 것 같다.
그치만 엄마가 나를 위해 용기 내어, 그 여자아이 집에 찾아갔을 장면을 생각하면, 나는 왠지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