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전공은 영어영문학이다. 대학 1학년이 끝나면 전공을 정하게 되는데, 당시 시에 빠져있던 내가 국문과에 가고 싶어하자 부모님은 결사반대 하셨다. (당시에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던 나는, 조금은 현실감각을 찾기로 하고, 영어로 된 시와 소설도 같이 읽으면 더 좋겠구나 싶어 학점 턱걸이로 영어영문학과에 들어갔다.
그런데 영어로 된 시와 소설은 국어와 전혀 같지 않았다. 영어로 말하기는 더더욱 힘들었다. 그 운율도, 그 감각도 전혀 와닿지가 않았다. 그 많은 사교육이 부질없었다. 영어를 문학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이었던 거다.
영시를 아름답게 읽는 동기의 모습에 자극받은 나는, 어떻게든 부딪치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휴학을 하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로 떠났다. 첫 3개월 동안은 어학원에 등록했는데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이 대다수였다. 고만고만한 실력들의 동북아 사람들이 강의실에 앉아 억지로 영어대화를 주고받는 풍경.
영어가 느는 건지, 한국어가 느는 건지 알수 없던 3개월이 지나고, 나는 일을 시작 해야만 했다. 호주가서 직접 돈을 벌테니 걱정말라고 부모님께 떵떵 소리치고 왔던 나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나에겐 일할 능력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영문과 타이틀 만으로도 과외로 한달 용돈벌이는 문제 없었다. 선생님 소리 들으며, 편하게 앉아 아이들과 문제집만 풀면 됐다. 하지만 호주에서 나는 무엇도 아닌 사람같았다. 영어도 잘 못하고, 체력도 변변치 않은. 그냥 동양인 여자애일 뿐이었다.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건 한국인 식당에서 최저시급보다 낮은 시급으로 일하거나, 농장에 가서 오렌지를 따는 일 정도. 영어를 배우러 왔는데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학원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와 의기투합해 몇 줄 적혀있지도 않은 이력서를 수십장 뽑아 멜번에 있는 호텔이란 호텔을 다 돌며 이력서를 뿌렸다. 다짜고짜 눈에 보이는 호텔에 들어가, '너희 하우스키퍼 구하니? 내 이력서니 자리 생기면 연락줘' 하는 대사를 수십번 읊는, 그야말로 무대뽀 취업이었다.
다행히 한 호텔에서 연락이 왔다. 필리핀 출신 매니저 리나벨은 우리가 잘할거 같다고 생각했다기보다, 둘이 셋트로 움직이니 쓸모가 있다고 생각해서 우리를 채용했다고 했다. 콜롬비아 출신 마리아에게 침대 시트를 가는 법, 화장실과 욕조를 청소하는 법을 배웠다. 'TRAINEE' 명찰을 달고, 어색한 유니폼을 입고 일을 시작했다.
농장에 가서 오렌지를 따는 것보다는 영어를 쓸 기회가 많기는 했지만 주로 혼자서 청소할 방에 들어가 청소를 하고 나오는 일이라, 일과 관련된 영어를 할 일은 별로 없었다. 거기다 몸쓸 일이 많아서, 일을 시작하고 첫 며칠은 퇴근하면 잠만 잤다. 몸을 써서 뭔가를 해보는게 처음이라 삭신이 쑤셨다.
시간이 흘러 점점 일이 손에 익고, 속도도 붙으며 완벽하게 방 하나를 청소했을 때 왠지 모를 자부심까지 생겼다.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일, 몸을 쓰는 노동에 대한 가치를 배울 수 있었달까.
일주일에 4-5일 정도 출근을 했는데 다행히 주말에는 쉴 수 있었다. (주말에는 특근 수당이 붙어서 더 경력있는 직원들이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돈도 없는 외국인노동자로서, 뭐라도 해야 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DVD와 친구가 사온 해리포터 시리즈 DVD는 나의 영어 교재였다.
특히 해리포터와 그 친구들의 여정에 말그대로 '마법처럼' 사로잡혀서, 매일 봐도 질리지 않아 대사를 외울 정도였다. 그리고 덕질을 더 철저히 하기 위해 원서를 읽기 시작했다. 모르는 단어를 전자사전으로 찾으면 (당시엔 전자사전이라는게 있었다! 대학생의 필수품!) 마법과 관련된 단어들이라 (약물을 젓다, 마법지팡이 등등) 일상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어휘력이 높아지기도 했다. 호주에서 해리포터와 혼혈왕자까지 원서로 읽고, 한국으로 돌아오자 마지막 책인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이 출간되었는데, 한국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뒤로하고, 3박 4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책만 읽으면서 해리와의 대장정을 끝마쳤다. 해리포터는 나에게 영어 선생님이자, 호주 생활을 지탱하게 해준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1편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는 좀 심하다 싶게 더즐리 가족이 해리를 구박하는 장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마치 내가 구박받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사실 나 또한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이방인으로서 호주라는 세계에 멋도 모른채 발을 딛자, 전혀 다른 세계에서 나라는 존재는 다르게 정의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던 해리가, 마법의 세계에서 영웅으로 다시 성장하는 것에 함께 행복했던 것 같다. 해리와 친구들이 무언가를 해내고, 찾아가는 과정에서 대리만족을 느꼈달까. 호주에서 그렇게 1년을 지내고 나니, 영어책도 읽게 되고, 영어도 곧잘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사실 나의 영어의 팔할은 해리포터에게 배운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직도 텔레비전에서 해리포터 시리즈를 많이 방영할때마다 나도 모르게 채널을 멈추게 된다. 여전히 어리기만한 해리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무모했던, 그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배움들을 떠올리게 한다.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마지막, 악의 상징인 볼드모트가 마법사의 세계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된 덤블도어는 해리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제 쉬운 일과 옳은 일 사이에 선택을 하게 될 거다
해리를 비롯한 주인공들은 어렵지만 옳은 일을 선택해 결국 마법 세계를 지켰다. 다만 마법 세계가 아닌 지금 나의 세상에선 옳은 일을 선택하는 것으로는 이기지는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후회되지 않는 일이 될 것이라고 믿는 어른이 되고 싶다. 쉬운일과 옳은 일중에 옳은 일을 아는 어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