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당시엔 삼성그룹의 인적성검사인 SSAT를 취업의 시작이라고들 했다. 대학졸업 직후 꿈을 찾아 가시밭길로 떠났던 나는 석달치 월급을 체불한 두 번째 회사를 때려치우며 내 다시 영화일을 하지 않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취업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결국 또 하고있다.) 나는 절대 삼성그룹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취준생이라면 응당 SSAT는 봐야하는 거라길래 보게 됐다. 중고 문제집 하나 사놓고 시험 당일까지 펴보지도 않았다. 사실 시험날 아침에도 갈까 말까 엄청 고민했다. 하지만 집에 있어봐야 엄마 잔소리만 들을테고, 그래도 뭐라도 하나 시작 해야지 싶어서 꾸역꾸역 집밖에 나왔다. 그때 내 몰골이 기억난다. 머리는 한지 오래되어서 부스스했고, 후줄근한 청록색 셔츠, 맨날 입는 청바지, 줄무늬 가디건. 화장 따위 해서 뭐하나 싶어서 선크림만 바르고 나왔다.
시험장은 강남 어딘가여서 지하철을 타고 꽤 가야했다. 지하철에서 중고로 산 문제집을 펼쳤는데 5분 만에 도로 덮었다. 당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험장인 중학교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나도 그 행렬을 따라 내 시험장을 찾아 흘러들어갔다. 요새 중학교는 좋구나, 구경하면서 설렁설렁 교실에 들어서 내 자리를 확인하는 순간,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와 목소리의 주인공이 매치되자마자 “망했다”라는 마음의 소리가 머릿속에서 돌비 서라운드 5.1 채널로 재생됐다. 듣자마자 내 심장을 관통하는 그 목소리. 나의 동아리 친구였던, 그리고 내가 열렬히 짝사랑했던 목소리.
그와 오랫동안 친구로만 지냈다. 그에게 첫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홀로 속앓이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고백을 해버렸었다. 그리고 나선 연락도 한번 안하고 지낸지 2년이 지났었다. 답없는 고백을 하고 돌아서던 그날, "데려다 줄 필요 없어. 그럼 안녕" 하고 악수하고 뒤돌아선 내 모습은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 후 어마어마하게 멋지게 변한 모습으로 그와 재회하겠다 다짐했고, 그 장면을 수십번도 더 머릿속으로 상상해왔는데. 그 결정적인 재회가 SSAT 시험장이 될 줄 몰랐다. 맑게 웃으며 그가 말했다. "너 내 뒷자리더라?" 머릿속에서 심한 욕이 나왔다. 그랬다. 나는 너의 뒷자리, 너는 나의 앞자리. 나는 시험 보는 내내 그의 등짝을 보고 있었다. 내가 그 앞자리가 아닌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면서. 내가 한번도 안아본 적 없고, 안겨본 적 없는 그 널찍한 등짝. 이제는 더더욱 만질 수 없게 된 그 등짝. 그 등짝만 몇시간을 보다가 시험이 끝났다.
2009년 10월, 동아리 활동을 끝나고 그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내 생일이라는 걸 잊지 않던 그가, 생일인데 뭘 하고 싶냐고 묻길래 영화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날, 그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영화 <호우시절>을 봤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비가 내려서 작은 내 우산을 쓰고 함께 걸었다. 그 두근거림, 설렘, 가슴 벅참 덕분에 왠지 고운 색으로 칠해져있던 날이다.
영화 <호우시절>은 아련한 추억만을 남기고 헤어졌던 두 사람, 동하와 메이가 우연히 다시 만나 과거 서로의 모습을 기억하며, 현재의 하루를 함께 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과거는 과거에게 맡기고, 현재를 향해 돌아선다. 그들의 재회는 참 아름다웠지만, 나의 재회는 한편의 시트콤 같았다. 나는 그를 등지고 돌아섰을 때 다짐했던 것보다 특별한 사람이 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절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함께 작은 우산을 쓰고 걸었던 그 길, 어느날 아침 나를 깨워주던 그의 목소리를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 그렇게 열심히, 그토록 미련하게 누군가를 좋아했던 추억속의 나를 기특해한다. 그 시절을 지나 이렇게 자란 나를 향해 미소를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호우시절>은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 는 중국의 시인 두보의 시 구절이다. 추억이란 소나기 같다는 생각을 한다. 말 한마디, 익숙한 향기, 노랫말 하나 같이 버튼 하나가 눌려지면 소나기처럼 추억들이 우수수 떨어져 감정을 적신다. 한번쯤 용기내서 그 널찍한 등에 기대었다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까? 그건 모를 일이다. "그때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감정으로 시작해서 "지금을 살아가자"는 마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마도 이 영화의 의미였던 것 같다.
그때의 나에게, 문득 내리는 마음의 소나기에게 고마워 하면서, 지금의 순간, 지금 내 삶에 거짓말 하지 않고, 후회를 줄여가면서 걸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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