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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hyu Dec 07. 2021

The 'LIFE' Must Go On

내 삶은 쇼보다 더 소중하다는 걸 깨닫기까지

PD를 그만 둔지 몇 년이 훌쩍 지났다.


처음 방송국을 뛰쳐나왔을 땐 악에 바쳐 방송국 안의 모든 부조리함을 까발리겠다며 당차게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었다. 하지만 관련 글을 쓸 때마다 심장이 떨리고 눈물이 줄줄 흘러 도저히 글을 쓸 수 없었다. 티비를 볼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화면 뒤의 제작진의 고통이 떠올라 몇 달간은 티비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새로 직장을 잡으려 면접을 볼 때도 조금이라도 방송국 생활을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면 예민하게 반응하고 면접이 끝난 뒤에 미친 사람처럼 오열했다. 일 년 동안 고통 속에 살다 찾아간 상담 선생님에 말에 의하면, 나는 평생 방송국 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트리거(trigger)'가 있을 때마다 내 몸과 마음은 힘들었던 그 순간을 다시 겪는 것과 같이 반응할 수도 있다고 했다. 평생. 


퇴사로 해소될 줄만 알았던 고통이 내 안에서 무한 반복된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난 오히려 회사를 다닐 때보다도 더 우울하고 절망스러웠다.


그래도 난 죽지 않았고, 피디였던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겪은 무직 생활과 새로운 직장 생활은 그대로 괴로울 때도 있었고 재밌을 때도 있었다. 좋은 날들과 나쁜 날들이, 포기하고 싶은 날들과 괴로운 날들과 즐거운 날들과 평온한 날들이 몇 번이고 반복되고 나서야 는 왜 사람들이 '아픔은 시간이 치유해 줄 것'이라고 말하는지 깨달았다. 삶에 영원한 것도 절대적인 것도 없음을 배웠기 때문이다. 시간은 꼭 무언가를 해야지만 지나지도 않고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고 안 지나가지도 않는다. 오늘은 지나가고 나에게 닥친 상황은 변한다. 상황이 지나가가는 걸 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이다. 살아있는 것. 살아가는 것. 죽지 않고 시간이 지나가도록 하는 것. 삶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것.


그제야 방송국 안에서 나를 괴롭힌 일은 사람들도, 많은 업무량도, 부족한 수면시간과 개인 시간도 아닌 "The Show Must Go On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라는 마음가짐임을 깨달았다. 나의 삶보다, 나의 동료들의 삶보다, 당장 이번 주 방송이 나가는 걸 더 중요시 여기는 방송국 안에서의 우선순위. 누군가 아프고, 다치고, 심지어 죽더라고, 방송은 계속됐다. 피디로서 당연하게, 어쩌면 치열한 피디 준비생 시절부터 내가 나 자신에게 세뇌시킨 - 무슨 일이 있어도 방송은 나가야 한다-라는 진리.


하지만 그건 사실도 진리도 아니다. 쇼는 계속되지 않아도 괜찮다. 쇼를 완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삶은 없다. 쇼는 인생의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의 삶은 쇼보다 더 크고, 그 큰 존재를 깨닫기 위해선 계속 살아야 한다. 그러기에 "The Show Life Must Go On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방송가도 그 새 조금은 상황이 나아졌다고 전해 들었다. 많은 동기들과 선후배들의 퇴사가 이어졌고, 미투 운동이 일어났고, 티비와 방송 산업이 큰 변화를 겪으며, 적어도 불의에 항의하는 게 이전보다는 조금은 나아진 (하지만 여전히 완전히 쉽진 않은) 듯하다. 나와 함께 편집실에서 울음 섞인 밤들을 보내고, 우리가 원하는 방송가의 문화를 토론하고, 퇴사를 고민했던 존경하는 멋진 선배들과 동기들, 그리고 후배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나의 마음 한편을 든든하게 해 준다.


방송가의 모든 이들이 괜찮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혹시 나와 같은 어두운 동굴을 걸어온 이들, 그리고 혹시 오늘 밤 상암동 한 편집실에서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 한 친구를 위해 글을 써보려 한다. 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모두가 퇴사를 결론으로 찾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아니다. 그저 내가 느꼈던 것처럼 처절하게 혼자 고통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글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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