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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hyu Aug 16. 2024

몇 년이 지나도 괜찮지 않은 일들

지난 글에서 거짓말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저 시간의 흐름 뒤에 숨고 싶은 마음이었을 뿐. 과거를 외면하고 있는 사이 상처받은 내가 알아서 사라져 줬으면 했다. 과거의 나와 내가 겪은 일들을 한 데 꽁꽁 묶어 심연 아래로 던져놓으면 없던 일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단단하게 묶였다고 생각한 매듭은 자꾸만 풀어지고, 지저분하게 엉킨 마음들이 두둥실 떠올라 새로 채워진 시간을 탁하게 만든다.


1년 반쯤 전부터 다시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피디를 그만둔 뒤에 여러 직장을 거쳐 왔는데, 계속 일정한 패턴으로 고통받고 퇴사하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나는 브레이크 없는 차처럼 미친 듯이 일한다. 동시에 상사와 팀원들의 일과 심리적 부담까지 자발적으로 가져와 떠안는다. 그러다 (당연히) 번아웃이 오고, 힘들어하는 나를 알아주지 않는 상사와 회사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사실 그들은 내가 번아웃이 온 것조차 못 알아차린다. 내가 티를 내지 않으니까). 결국 혼자 괴로워하다 '이러다 죽겠다' 싶은 시점에 퇴사를 한다.

보통 퇴사를 한 후엔 내가 이 사회에 기여하는 게 없는 것 같아서, 그리고 <흔한 가정주부>가 되는 게 너무나도 싫어서, 지금껏 쌓아온 커리어가 아까워서, 늘 꿈꿔오던 당당한 여성 직장인이 되고 싶어서, 등 많은 이유 때문에 최대한 빨리 다음 직장을 찾았다. 벌이가 없는 것보다도 내가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적이고 돈이 나갈 데가 없었으며, 무엇보다 나를 재촉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남편은 내가 괴로움의 사이클에 되돌아가는 걸 말렸다. 그렇게 기약 없이 회사를 떠나, 자책감의 늪을 건너, 그 누구도 날 괴롭히지 않는 오늘을 맞이하고 있는데... 여전히 괴로움은 이어진다. 과거의 일들을 오늘 겪는 것처럼 매일 겪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잔잔해지자 단단히 동여맨 과거들을 하나씩 펼쳐볼 여유가 생겼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다.

올해 초, 드디어 피디 시절 일들을 상담으로 다룰 용기가 났다. 그리고 상담을 받은 이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거기까지 밖에 할 수 없었다. 몰아치는 감정이 목을 옥죄이는 듯, 더 이상 그 시절에 대해 떠올릴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말을 할 수 없다 보니 상담 진행이 불가능했다. 몇 달 동안 심리상담을 쉬면서 나는 내가 괜찮아진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아마 첫 글을 쓰고 몇 년 동안 글을 못 쓴 것도 같은 데에서 비롯된 게 않을까.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가 된 느낌이었다. 말은커녕 숨을 쉬는 것도 다시 배워야 할 것 같은 순간들도 겪었다.  그럴 땐 급하게 집안의 모든 창문을 열어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조각난 마음을 치료합니다>*를 읽게 되었다. 과거의 나는 그저 나의 일부일 뿐, 나의 전체와 동일하지 않다는 관점을 익히자 현재 안전한 곳에 있는 나를 인지할 수 있었다. 나의 모순을 미워하고 지우려 하기보단, 내 안엔 충돌하는 여러 부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다. 내가 없애고 잊으려고 하던 약하고 비겁한 과거의 내 부분들을 바라보자, 그 부분들은 자신들을 바라봐줄 어른을 기다렸다고 안도하며 아이처럼 울었다. 그중 20대 초반, 복도에서 선배를 만날까 두려움에 떨며 편집실을 못 나가고 있던 피디 시절의 나도 있었다.

내 안의 그 아이는 여전히 편집실 안에서 숨을 죽이며 복도의 인기척을 알아차리려고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음을 느낀다. 무서운 선배를 만난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해야 무사히 넘어갈지, 머릿속으로 여러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잔뜩 긴장하고 있다. 무너지기 싫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결국 짓밟힐 것을 알기에 무력하고 괴로운 아이.

그 아이에게 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너가 겪는 일, 언니가 다 안다고. 너가 힘이 생겨 그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을 때까지 함께 있어주겠다고.

2024년 8월 16일.
심리상담을 재개하는 날 오전 기록.

*재니너 피셔, 조성훈, <조각난 마음을 치료합니다>, 더퀘스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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