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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hyu Aug 14. 2023

[intro] 편집실

한수는 이런 일을 하려고 힘들게 입사한 게 아니었다.


사내 교육 영상을 배포 완료한 다음 날이었다. <직장 내 괴롭힘을 멈추기 위한 3가지 방안>, <무심코 하는 말 한마디, 범죄일 수 있습니다>, <Say No! 직장 내에서 나를 보호하는 법> 등, 뻔한 교육 내용을 조금이라도 재밌게 만들기 위해 몇 주간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 그래도 국내 최고 방송국 안에서, 피디들이 (벌점을 피하기 위해) 유심히 보게 될 영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으쓱했다.


큰 프로젝트를 끝낸 만큼 하루 정도는 쉬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아, 물론, 휴가를 쓰겠다는 건 아니었다. 5년 차, 티 안 나게 회사 안에서 휴식을 즐길 짬밥 정도는 있는 한수였다. 오전엔 동기와 커피타임을 갖고, 미리 예약해 놓은 사내 마사지를 받으러 간 후, 바로 점심을 먹으러 갈 예정이었다. 느지막이 사무실로 돌아와 두세 시간 집중해 업무를 끝내고, 최대한 빨리 퇴근을 하는 게 오늘 한수의 목표였다. 어떻게 티 안 나게 노느냐가 관건이기에 묘한 스릴감까지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커피타임 10분 전. 슬슬 카페로 내려갈까 해서 핸드폰을 챙겨 일어나고 있는데, 안 팀장님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어, 한수 대리, 마침 일어나 있네. 빨리 나랑 같이 편집실 좀 가자.


한수와 관련된 편집실은 어제 배포된 영상을 맡긴 외주 편집실 밖엔 없었다. 영상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윗 분들이 문제 삼을 만한 내용이 있었나? 아 아무래도 대표님 자제님이 성추행 사건에 연루되셨으니 역시 그 부분은 조금 더 부드럽게 워딩을 할 걸 그랬나? 급하게 바꿔서 재배포를 하면… 공지는 어떻게 워딩을 수정해야 할까… 종종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팀장님 뒤를 따라가는 동안 한수의 머릿속은 오만가지 생각으로 넘쳐났다.


1층으로 가시겠지라는  예상과는 달리 팀장님은 3층을 눌렀다. 피디들이 쓰는 사내 편집실 층 중 하나였다.

가까이에서 본 팀장님의 상태는 처참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땀이 줄줄 흐르고 각 잡힌 흰 셔츠 안에 갇힌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늘 칼 같던 꼰대 중의 상꼰대인 안 팀장님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너무 당황스러워서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이 정도인 건가? 아니 잠깐, 이거 나 괜히 휘말렸다가 엄청 고생하는 거 아니야? 아- 오늘 완벽하게 농땡이 치는 날이었는데.   


-한수, 군대 다녀왔지?

-네, 다녀왔습니다. 

-그래… 저, 비위는 어때, 좀, 괜찮나?  


비위? 편집실에서 누가 토한 거 아니야…? 아니면 이 정도로 땀날 정도면 누가 죽었나? 아 설마- 똥 밟았다.


-비위… 그리 좋지는 않은 편입니다.


[3층입니다]


감히 나에게 반박해?라는 특유의 표정으로 한수를 째려본 뒤 팀장님은 바삐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하 진짜 좆같은 회사생활, 이럴 거면 물어보긴 왜 물어본 거야. 코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한수는 그 뒤를 따랐다.


인사팀으로 입사해서 편집실이 있는 층에 올 일은 거의 없었다. 입사 후 회사 투어를 할 때 한 번, 피디 동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한 번. 오랜만에 온 편집실 복도 카펫에선 여전희 희미한 라면 냄새가 풍겼다. 구내식당을 잘 차려놔 줘도 뭐 하나, 이렇게 라면만 먹으면서 자신들의 몸을 축낼 거면 -이라는 생각도 잠시, 복도를 꺾어 들어가자 심각한 표정으로 모여있는 피디 몇 명이 보였다.


그중에서 한수가 생일을 축하해 준 동기도 보였다. 팀장님 뒤에서 동기에게 “무슨 일이야-” 하고 입모양을 뻐끔거렸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동기. 피디들 앞에 도착한 안 팀장님은 소곤거리듯이 말을 했다.   


-많이 놀라셨죠? 말씀드린 대로, 인사팀에서 곧 따로 연락드릴 테니 그동안은 누구한테도 이 일 공유하지 말아 주시고요. 바쁘시겠지만, 최대한 집에 가서 며칠 동안은 안정을 취하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저희 인사팀에서 따로 도울 수 있는 일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 주세요. 명함 드리겠습니다. 한수 씨, 명함 드려.


하 역시 이러려고 부른 건가, 누굴 쓰레기 업무 처리반으로 알지 아주 -라는 생각을 숨기기 위해 한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에 미소로 응답해 주는 피디는 아무도 없어 기분이 더 나빠졌다. 지갑 속 명함이 충분하지 않아 결국 모두에게 한수의 연락처를 공유해야 했다. 마지막 피디의 핸드폰에도 한수의 번호가 찍히자, 피디들은 우르르 자리를 비켰다. 아주 동네 북이 된 느낌이었다. 가기 전 눈인사를 해준 동기 피디가 아니었다면 쯧-하고 혀를 차며 자신이 기분 나빴음을 표할 뻔했다.


그러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펼쳐진 광경에 한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설마. 안 팀장님의 손짓에 홀린 듯이 들어간 한수의 뒤로 편집실 문이 굳게 닫혔다. 그리고 찾아온 어둠. 복도의 빛이 사라지자 한 줌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편집실이었다. 한수는 황급히 불을 켰다. 


딸깍.


두 평 남짓한 작은 편집실이었다. 책상 위엔 두 개의 모니터와 알록달록한 키보드가 놓여 있었다. 공동 편집실이 아닌 개인 편집실이었지만 미리 비워놓은 것처럼 자리는 깨끗했다. 편집실 한편엔 작은 소파가 있었고 소파와 벽의 틈 사이엔 라꾸라꾸가 접혀 세워져 있었다. 아늑했지만 좁았고 숨이 막혔다. 


네 사람. 편집실 소파와 바닥에는 네 사람이 앉거나 누워 있었다. 언뜻 보면 그저 편히 쉬고 있는 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편집실 안의 적막이 그들이 잠을 자는 게 아님을 대변해 주었다. 팀장님의 가파른 숨소리에 한수는 자신도 숨을 쉬어야 하는 걸 문득 깨달아, 숨을 들이마시고, 숨을 내쉬었다. 


혼란스러웠다. 입사 후 이렇게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건 처음이었다.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라고 속으로 계속 반복해 생각했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지금 뛰쳐나가기엔 한수는 이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희생한 모든 것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뛰쳐나가면 그가 잃을 것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남음으로써 얻을 것들을 생각했다. 머릿속에서 셈을 하는 동안에도 놀라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차오르는 눈물은 막을 수 없었다. 


-한수 씨, 이제 이분들 핸드폰이랑 공책 다 수거하자고. 내가 대충 몸 아래로 밀어놨어.

-... 네?

-이거 잘못하면 우리 인사팀이 다 덤터기 쓰는 거야. 우리도 우리를 보호할 최소한의 총알은 갖고 있어야지.  


한수는 뻣뻣해진 고개를 들어 안 팀장님과 눈을 마주쳤다. 시뻘겋게 충혈된 팀장님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있었다. 그의 얼굴로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아아. 팀장님도 한수와 같은, 아니 어쩌면 한수보다 더 힘든 감정을 겪고 있는 것이었다. 왈칵, 존경심과 애잔함이 한 데 섞여 넘쳐흘렀다. 그렇게 두 남자는 서로를 몇 초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몸을 움직여 피디들의 몸을 조심조심 발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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