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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빛의 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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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 Aug 26. 2023






설익은 흙을 조심히 밟고서

그 이름만 열 번 곱씹었던 길을 가라 한다

차가웠던 이슬이 까슬하게

볼을 스치던 기억이

성급하게 떠오른다




가던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은

이 길이 익숙한 탓도

발목이 강인한 탓도  

숨이 남는 탓도 아니다

그건 못 본 체하고 싶은 것들이

길가에 만개한 탓이다

 



바스러지는 흙이

걸음걸음마다

내가 어디론가 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뒤돌아 보면 어지럽게 펼쳐진 발자국들

시간을 발아래 딛고서

꼬박꼬박 걸어왔음을 알 수가 있다




자욱이 아프다-

그러니 재빨리 앞을 혹은 바닥을 바라본다

시선은 분산되고 흐려진다

어디로도 갈 수 있는 것일까

안개가 반갑다




고개를 무겁게 하고선

안개를 핑계 삼아

걸음을 하나 둘 뗀다

도달해야 할 곳이 애초에 없었다는 건

알고 있다 자부했지만

막상 그것이 서러운 건 어쩔 수 없다 하겠다

그렇게 한 걸음의 시야를 겨우 옮겨 놓고선

나는 또 갈망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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