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상자의 문을 여는 것도, 닫는 것도
모두의 의도가 담겨있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그저 어느 날은 문득
열려있는 문 틈이 신경 쓰이는 거다
그럼 일어나 앉아
축축한 골짜기 같은 숨을 내쉰다
얼굴 여기저기에 들러붙은 머리칼을 떼어내며
산발적인 것들을 대강이나마 쥐어내며
기대를 기대하던 시간 곳곳이 퍼석해졌고
그걸 손가락 끝으로 찍어 맛보는 행위가
꽤나 기괴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꼬깃하게 그림자 속에 쑤셔 넣어졌던
번지지 않은 메모들은
상자를 가득 채워낸다
문을 여닫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 자해가 되어버린다
지워지지 않는 드문 것들 때문에.
그렇게 안개가 동공을 예고도 없이
떠나는 버리는 날이면
마주하는 것들이 그저 그렇게까지 서럽다.
더 이상 종이를 펴보고 싶지가 않아 졌을 때 즈음
믿음직한 나의 안개는 다시 돌아오겠지.
그러면 녹이 쓴 시곗바늘이 내는 소리가
더 이상 날카롭지가 않게 되는 거다.
무딘 시야를 얻는 날, 그런 날, 아주 보통의 날
다시 웃음 지을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은
나를 그렇게나 괘념케 한다.
까만 공기에 하얀 입김을 불어넣으며
밤하늘 위의 달을 바라보게 한다.
그 어떤 기도라도 바스라지게되어
모든 기대를 쉽게 삼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