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작가 아뱅
입이 짧고 까다로워서 피곤한 스타일. 어쩐지 김치는 무서워(!)하고, 기운이 없을 때는 비타 오백, 외로울 때는 떡볶이를 찾는다. 주식은 파스타. 본업은 글쟁이지만 사실 엄청난 파스타 요리사가 되고 싶은 꿈이 있다.
올리브 오일과 치즈의 값어치를 깨달은 나
대학 때 짜장면을 굉장히 좋아하는 친구와 나중에 취업을 못 하면 식당을 차리자고 이야기했다. 가게 이름은 ‘누들누들’. 나는 파스타를 만들고, 친구는 수타 짜장면을 만들기로 했다. 인테리어도 반반 나눠서 한쪽은 중국집, 한쪽은 이태리 느낌이 나게 하자고 틈만 나면 휘황찬란, 허황된 아이디어를 쏟아내며 즐거워했던 나날. 그러던 어느 날 수타 짜장면을 만들겠다고 했던 그 친구는 다 먹은 짜장면 그릇에 필히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건더기도 남기지 않고 흔적도 없이, 여름 방학이 끝나고 사라져버렸다(진짜다).
아직도 ‘누들’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증발해버린 친구와의 아련한 추억이 재생된다. 가게를 차리고 싶을 만큼 진심이었던 파스타를 향한 꿈은 공효진, 이선균이 주인공이었던 드라마 <파스타>에서 시작됐다. 아주 전형적인, 갖은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주방의 유일한 여자 공효진은 ‘파스타 배달’이라는 셰프들에게는 다소 센세이션한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올리브 오일과 마늘, 치즈를 넣은 알리오올리오를 끊임없이 연습한다.
만들고 맛보고 버려도 완성되지 않는 맛은 대체 무슨 맛인지 궁금했다. 집에 있던 식용유, 피자를 먹고 남은 파마산 치즈 가루와 K-가정집의 흔한 마늘로 알리오올리오에 도전했다. 내 생의 첫 파스타다. 완전체를 먹어본 적이 없으니 이게 진짜 맛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치즈를 처음부터 뿌려도 보고, 접시에 담고 나서 뿌려 보고 식용유 대신 해바라기유(다양한 종류의 기름 선물 세트는 어느 집에나 다들 있지 않나?)도 써보며 여러 차례 만든 알리오올리오는 맛있다기보다 재밌었다.
평소 먹는 것보다 요리 하는 것을 좋아해서 과정을 살짝만 바꾸고 재료를 추가하고 빼도 맛이 급변하는 파스타 만들기가 즐거웠다. 얼렁뚱땅 요리사의 파스타 맛은 해외 유학시절 정점에 이른다.
‘감자국’으로 불리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감자 대신 더 많이 먹었던 게 파스타와 떡볶이다. 주식이 파스타였다면, 한국 음식이 생각나는 한 달에 한 번은 떡볶이를 먹었다. 우리나라보다 파스타 면도, 시판 소스도 종류는 많고 가격은 훨씬 저렴했다. 얇아서 냉파스타 해먹기 좋은 카펠리니, 로제 파스타에 잘 어울리는 링귀네, 이탈리안 친구가 만들어준 원조 카르보나라로 처음 영접한 동그랗고 두툼한 리카토니까지… 파스타가 사람이었다면 영화 <23아이덴티티>에 나온 23가지의 인격을 가진 케빈처럼,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 안에 또 다른 사람이 숨어 있는 것처럼(쓰고 보니 섬뜩한 예시다) 정해진 것 없이 맛과 모습을 바꿔가며 질리지 않는 가히 무적인 존재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없는 외국에서 ‘오늘 뭐 먹지?’는 일상의 고민이었고, 파스타는 늘 좋은 해결책이었다.
더블린에서 어학원을 다닌 지 두 달쯤 되던 때 우리 반에 너무 예쁜 이탈리안 친구 수잔나가 새로 왔다. 어디에서 왔냐는 첫 질문에 이탈리아라고 말했던 그 순간부터 나는 내 생에 처음 만난 이탈리안에게 꼭 파스타 비법을 전수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미안해 수잔나). 수잔나와 꼭 친해지고 싶어서 공을 많이 들였다. 나보다 영어를 잘 못해서 친구가 없던 수잔나를 다른 친구들과의 모임에 데려갔고 함께 카페도 가고 공원도 갔다. 드디어 수잔나가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해줬다. 파스타를 만들어주겠다고. 기다렸던 순간이다.
진짜 주식처럼 파스타를 먹었을 이탈리안에게 전수받은 원조 카르보나라 파스타 비법을 공개한다. 면 종류는 상관없다. 이날 처음 리가토니 면을 먹어봤는데 씹는 식감이 아주 재밌다. 일단 돼지 뱃살로 만든 판체타가 필요하다(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드니 기름기 많은 베이컨이면 된다). 면을 삶을 동안 판체타에 소금, 후추를 뿌려 바삭한 상태까지 구우면 기름이 잔뜩 나온다. 타지 않게 잘 굽고 불을 끈다. 그 사이 신선한 달걀에 질 좋은 파마산 치즈와 후추를 잔뜩 넣고 섞는다. ‘치즈를 이렇게 많이 넣어도 괜찮을까?’ 라고 생각될 정도로 많은 양의 치즈가 필요하다. 계속 섞다 보면 어느 정도 점성이 생긴다. 삶은 면을 판체타가 있는 후라이팬에 넣고 기름으로 코팅해 준 다음 한 김 식힌다. 계란이 익지 않도록 충분히 팬을 식히는 게 키 포인트. 그 위에 계란+치즈 물을 뿌려 섞으면 끝.
계란과 치즈가 노랗게 코팅된 면은 부드럽다. 씹을수록 치즈의 쿰쿰한 향과 면의 고소함이 혀와 코를 찌릿하게 자극한다. 들기름 막국수처럼 자극적이지는 않아도 담백해서 자꾸만 먹고 싶은 맛이다. 질린다 싶을 때는 후추를 뿌리면 입맛은 깔끔하게 리셋된다. 밥으로, 주식으로 먹는 파스타란 이런 것임을 깨달았다. 평소보다 후추는 더 많이 뿌려도 좋다. 하얀 크림 속에서 면을 건져 먹는 한국식 크림 파스타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계란으로 만든 원조 카르보나라는 정말 맛있었다. 그동안 수잔나에게 공을 들인 보람이 있었다.
흔한 파스타 러버였다면 여기에서 멈췄을 것. 하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파스타 요리사가 되고 싶은 막연한 꿈이 있다. 원조 레시피에 마늘, 페퍼론치노를 첨가하면 그 맛은 호불호 없이 감칠맛 폭발하는 무적의 카르보나라가 된다. 여전히 나의 시그니처 메뉴다. 여기에 야채나 새우를 첨가하면 카르보나라의 스펙트럼은 넓어진다.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준 파스타를 먹고 맛없다고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레스토랑에서 먹는 파스타도 내 것보다 맛있었다고 느낀 곳은 많지 않다.
레스토랑보다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 수 있지만 때론 배달하거나 사 먹는 인스턴트 파스타만의 맛이 생각날 때가 있다. 사실 이런 파스타는 ‘스파게티’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린다. 배달로 스파게티를 주문하면 면은 퉁퉁 불거나 뚝뚝 끊기는 상태 둘 중 하나다. 피자치즈가 듬뿍 올라간 치즈 오브 스파게티는 쫀득한 치즈 밭을 헤치고 토마토 소스와 따로 노는 불어터진 면이어야 제 맛이다. 올리브 오일의 우아한 향도, 파스타 면 특유의 씹을수록 느껴지는 고소함도 없지만 목구멍 너머로 부드럽게 잘 넘어가는 푸근한 스파게티만의 매력도 사랑한다.
더블린과 런던에서 면 1kg에 1000원, 토마토 통조림 캔 500원짜리로 가성비 갑 스파게티를 주식으로 일삼던, 눈물 나게 가난한 유학 시절을 지나 이제는 한 병에 만 원이 넘는 올리브유와 300g짜리 파스타 면이 4000원을 넘어도 고민 없이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다. 최근에는 치즈를 갈아서 사용해보고 싶어 치즈 그레이터와 그라나 파다노 치즈도 장만했다.
인생이란 한치 앞을 알 수 없다. 그래서 때론 캄캄하고 암울한 삶 속에서 내 마음대로 조종하고, 변형하고 만들어 갈 수 있는 파스타의 존재는 ‘오늘은 뭘 먹지?’라는 인생 최대의 고민이 드는 끼니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나에게 든든한 위안이 된다.
치즈를 갈다가 면을 삶는 시간을 놓쳐 면이 불어도 ‘다음에 더 잘 만들어야지’라고 가볍게 스스로를 다독이고, 더 맛있을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 많지 않다는 걸 깨달은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면발 마다 좋은 올리브 오일과 비싼 치즈로 반질반질하게 코팅 했을 때, 이전보다 더 나은 맛의 파스타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안지도 불과 얼마 전 일이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알아버린 이상 나는 마실 물은 떨어져도 베이컨, 마늘, 파스타 면은 늘 구비하는 것처럼 비싼 올리브 오일과 질 좋은 치즈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타자를 치고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