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_피로사회; 치밀하게 피로를 정의하는 즐거움(#이성)

좌뇌, 피로한 만큼 세련된 출력 장치

by 혜인

피로할 때 서점에 가서 집게 될 만큼 얇고 쉽고 간결해 보이는 책의 겉모습과는 다르게 읽는 이들에게 피로함과 함께 좌뇌의 단련을 선물할 수 있는 치밀한 책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꾸준히 철학 공부를 하고 있는 독서모임 회원 한 분께 물었다. "우리가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분은 수학이나 철학을 하게 되면 좌뇌가 피로한 만큼 세련되진다고 했다. 좌뇌가 발달하면 우리는 다양한 상징과 추상적 개념을 잘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타인에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보다 왜곡 없이 전달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답변과 동시에 수학을 어려워했던 나를 돌이켜보며 '내 좌뇌가 출력장치로 구현되면 도스 컴퓨터의 모니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속으로 피식 웃기도 했다. 그래도 수학 책 대신 이 철학 책을 통해서 오래간만에 좌뇌를 좀 단련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뿌듯했다.

온라인 독서모임원 모두 얇은 '피로사회' 책의 두께에 방심했다가 큰코다쳤다고 했다. 공학을 전공하고 나서 철학, 문학, 신학까지 전공한 저자 한병철 교수의 좌뇌는 버전이 너무 높은 탓에 우리는 각자 책을 읽는 과정에서 고군분투하다가 함께 온라인 독서모임에서 머리를 맞대고야 비로소 즐겁게 책에 대한 대화를 읽어나갈 수 있었다.

『피로사회』는 현대사회의 성과주의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한 책으로, 과거의 부정성들이 많이 제거된 현대에는, 부족함과 결핍보다는 성과사회의 과잉활동, 과잉자극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할 수 있다!'는 구호 아래 스스로 자기 계발을 하라고 채찍질하기보다 오히려 사색적 삶, 영감을 주는 빈 공간과 여유, 휴식의 가치를 역설하며,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피로가 가진 또 다른 측면을 살펴본다. 그의 말에 따르면 피로는 과잉활동의 욕망을 억제하며, 긍정적 정신으로 충만한 자아의 성과주의적 집착을 완화한다. 또한 피로한 자아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채찍질하는 대신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책을 함께 읽으며 저자의 뜻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자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제시한 많은 양의 사례와 추상적 개념, 그리고 학술적 용어들로 인해 우리는 피로해졌고 덕분에 그 주에 독서모임 준비를 제외한 다른 여가활동을 삼가고 푹 쉬었으며 온라인 모임도 지친 채 참여해서 보통 때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더 진솔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자기 계발을 위해 달리는 대신 우리는 서로 더 돈독해지고 각자 나름의 영감을 얻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한 '우리-피로'인가.

피로할 때 근육이 쉬면서 성장하듯이 우리의 좌뇌 속 이성도 가끔은 각자의 좌뇌 능력을 뛰어넘는 책들을 읽으며 피로해지고 함께 이야기 나누고 쉬어가는 과정 속에서 성장한다고 믿는다.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가 아닌 내가 선택한 피로,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함께 좋아지는 피로라면, 그리고 그 피로 끝에 여유로운 쉼과 영감이 함께 한다면 그 삶은 더 이상 피로할지언정 괴롭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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