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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인 Dec 17. 2023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vs.잘 읽지 못하는 어른<문해>

 요새 영상 세대, 스마트폰 세대라는 말이 등장하며 책에서 점점 더 멀어질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문해력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교육계의 고민이 많다. 한편 나는 성인 문해력 역시 걱정될 때가 많다. 확실히 컴퓨터 세대 이전의 선배들을 보면 나를 비롯한 지금 세대 사원들보다 활자를 가까이하셔서 그런지 교정, 교열도 잘하시고 공적 문서 작성과 매뉴얼 독해도 잘 해내신다. 직장 밖은 더 심한 것 같다. 예능 자막과 인터넷 신문의 기사 오탈자는 빈번하게 볼 수 있고, SNS 상에서도 화자의 문맥을 알 수 없는 글들이 늘어나고 있다.     

 문해. 과연 제대로 읽는다는 것의 의미가 뭘까. 지문을 보면 모르는 단어가 없는 것? 대충 글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  오늘 소개할 <읽고 쓰지 못하는 아이들>이라는 책에는 선생님 한 분이 읽지 못하는 아이를 제대로 읽게 도우려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이 책에 나온 바에 따르면 진정한 문해는 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글의 의도, 핵심 주제까지 읽어내는 과정이라고 한다. 결국 우리는 단순히 글자를 아는 것을 넘어서 글의 전후 맥락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그 글을 쓴 한 인간 그리고 그의 세계와 만나야 한다. 

 세상살이와 내 삶을 이해하게 하는 도구가 언어다. 한글, 영어뿐 아니라 수학, C언어, 파이썬, 악보, 그림, 원소기호 등 세상과 우리의 삶을 나타내는 모든 것이 언어다. 문해라는 벽을 넘지 못하면 우린 서로의 우주를 들여다볼 수 없다. 별을 바라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 없는 우리이고 그렇게도 서로에게 관심 많은 우리인데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문해를 가로막는 것일까. 

 사실 비밀은 우리의 뇌에 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문자를 사용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문자를 쓰기 전 시대를 선사시대, 문자를 쓴 이후의 시대를 역사시대라고 하면 선사시대가 99퍼센트가 넘으니 사실 인류의 뇌가 아직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 뇌 형태에 더 가깝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는 선사시대 때부터 존재한 본능 뇌와 감정 뇌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예를 들어 본능 뇌의 반응으로 인해 인간은 충동적인 선택들을 하기도 한다. 생존과 번식에 불리한 상황에 처할 때 욕설이나 폭력을 하는 등 즉시 분노하기도 하고, 반대로 유리한 상황이라고 판단하여 즉시 흥분해서 과식, 과음, 어리석은 관계 맺음 등 후회할 선택을 하기도 하고 말이다. 또 감정 뇌의 반응으로 인해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어 잘못된 선택을 내리기도 한다. 슬픔의 지속으로 인해 우울에 빠져 본인을 끌어내리거나, 분노나 좌절로 인해 허기를 달래려 충동구매를 하거나, 조급함으로 인해 타인이 시행착오를 겪을 새도 없이 타인의 일을 대신해주는 오류에 빠지기도 하는 것처럼. 이때 우리의 폭주를 막아주는 것은 바로 역사시대 이후에 발달한 전두엽이다. 이성 뇌라고도 불리는 전두엽은 실증적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는 논리적이고 시니컬한 좌뇌와 감정뇌에 비해서 보다 세련된 감수성과 이미지들을 담당하는 우뇌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두엽 앞에 발달하는 이마엽(전전두엽)은 전체 뇌를 아우르며 자기 조절을 주관한다. 

 모든 인간이 전체 뇌 영역의 장점을 잘 살려서 전인적 인간이 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야속하게도 인간의 뇌는 전두엽을 사용하는 것을 회피하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전전두엽 역시 우리가 지속적으로 사용하며 연마하는 과정이 없으면 잘 기능하지 못하고 말이다. 제대로 읽고 쓰는 행위는 전두엽의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기에 본능 뇌에서 생존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을 내리고, 감정 뇌에서도 읽고 쓰는 것이 습관이 되기 전까지는 본능 뇌와 협업하여 부정 감정을 자아낸다고 한다. 

 멍하니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즐겁게 게임을 할 때는 몇 시간이 지나도 본능 뇌, 감정 뇌에서 거부반응이 없는데 제대로 읽고 쓰는 행위를 하려 하면 습관이 되기 전까지 비상신호를 보낸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인간이 이 동물뇌의 거짓 신호에 굴복하면 문장을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데 굳이 힘들게 읽으려 들지 않을 것이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합리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며 살아가기보다는 순간순간의 감정에 따라, 자신에게 어떤 것이 더 이익이 되는지 정확히 따져보지도 못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지만 나는 모든 인간이 아기 때부터 수십 번, 수백 번의 넘어짐 끝에 두 발로 걷기를 해냈던 것처럼 방법만 안다면 전두엽을 단련해서 동물적 본능을 거슬러 인간다워지는 과정인 문해를 성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동물 뇌의 방해를 뛰어넘어 문해력 향상에 성공할 수 있을까? 철학자 니체가 말하길 외부 상황에 굴복하거나 환경 탓을 하는 것은 동물에 가깝고, 진정한 초인이라면 자신이 정한 기준과 신념을 따르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진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 뇌가 성장하며 겪는 고통을 성장통으로 여기고 내가 주변을, 세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이 뇌 성장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이 점에서 초등학생에게 바른 자세로 국어책 소리 내어 읽기나 받아쓰기를 연습하게 하는 것이 아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니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나는 우리 아이들의 뇌 발달 과정에 필수적인 고통들을 막아버리는 것이 과연 진정한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아이의 고통을 다독이거나 지켜보는 것이 괴로운 어른의 편의주의적 사고는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하며...  

 무엇이든 해보기 전에는 어렵고, 또 제대로 알기 전에는 두렵다. 주변 사람과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세상 안의 일과 관계에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경험 안에서 만난 말과 글을 재료로 하여 자기 사고를 수정, 보완하고 확장하는 것, 또 이 의식 세계를 현실에 반영하여 다시 더 나은 행동으로 이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능동적인 문해다. 어쩌면 자신의 삶이 제자리걸음인 까닭이 관심이나 열정의 부족이 아닌 동물 뇌의 방해공작으로 인한 문해의 부족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25세면 뇌가 노화한다는 옛 학계의 정설과는 다르게 우리의 뇌는 엄청난 가소성이 있어서 죽는 날까지 발전할 수 있다고 한다. 100세 넘도록 주변과 세상에 열려 있는 동안 뇌를 가진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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