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프, 샵, 샾' 중에서
전화기 자판에는 1부터 0까지의 숫자 10개 외에 기호가 두 개 더 있다. *와 #가 그것이다. 이들을 한국어로 무엇이라 부르는가.
*표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누구나 '별표'라고 한다. 문제는 #이다. #을(를) 일컫는 말로 '우물정자'와 '샵'이 쓰인다. 그런데 '샵'은 사실 검색에 잘 등장하지 않는다. '샾'이 더 많이 나타난다. '샵'이든 '샾'이든 이른바 국어의 어말 중화 현상에 따라 발음이 같으니 어떻게 쓰든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외래어를 적는 방법인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샵'이 옳고 '샾'은 그르다. 외래어의 받침에는 'ㅋ, ㅌ, ㅍ'을 쓰지 않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ㄱ, ㄷ, ㅂ'을 쓰게 되어 있다. '샾'이 외래어 표기법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흔히들 '샾'이라 적는 것은 아마도 '샵'이 shop이라는 전혀 다른 단어를 떠올리게 될까봐서가 아닌가 한다.
'샵'이든 '샾'이든 그것은 음악의 반음 올림 기호를 가리킨다. 전화기 자판의 #이(가) 음악의 반음 올림 기호와 같은 모양이라고 보아 #을(를) '샵' 또는 '샾'이라고 하는 것이겠지만 사실 다시 외래어 표기법을 갖다 대자면 sharp은 발음이 [ʃɑːrp]여서 '샤프'이지 '샵'이나 '샾'이 될 수 없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장음인 모음 다음에 나타나는 자음은 모음 'ㅡ'를 붙여서 적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sharp pencil은 '샤프펜슬'이지 '샵펜슬'이나 '샾펜슬'이 아니다. 반음 올림의 sharp나 sharp pencil의 sharp는 같은 영어 단어 아닌가.
음악의 반음 올림 기호를 누구든 [샵]이라고 하지 [샤프]라고 하지 않는 데서 우리는 외래어 표기법이 현실과 맞지 않음을 보게 된다. 외래어 표기법을 들이대면서 반음 올림 기호를 '샤프'라고 발음하라고 강요할 수 있나. 그런 요구를 순순히 수용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외래어 표기법이 뭐라 하든 반음 올림 기호는 [샵]이라고 하지 [샤프]라고 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샤프'는 외래어 표기법이 요구하는 것일 뿐 현실은 '샾'이 상당히 널리 쓰이고 있다. 이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샤프'라고 발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국어사전에는 '샵'이나 '샾'이 아니라 '샤프'라 올려져 있다. 음악인들을 대상으로 반음 올림 기호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조사해보면 이 점이 더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샵', '샾'이냐 '샤프'냐를 놓고 길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은(는) 사실 음악의 반음 올림 기호와 모양이 정확히 같지는 않다. 조금 다른 모양이다. 음악의 반음 올림 기호는
이고 전화기 자판의 기호는
이다. 세로의 줄이 반음 올림 기호에서는 수직이고 #에서는 옆으로 약간 비스듬하다. 물론 #이(가) 음악의 반음 올림 기호와 모양이 살짝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비슷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을(를) '샵'이나 '샾'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그렇게 해오지 않았나.
그럼 #은(는) 뭐라 불러야 하나. 영어로 이 기호를 number sign, hash, pound sign이라고 하니 한국어로 '넘버사인, 해시, 파운드사인'이라 해야 할까.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샵, 샾'이라고 하거나 '우물정자'라고 한다. 심지어 같은 ARS 안내에서 앞에서는 '샵을 누르세요'라 했다가 뒤에서는 '우물정자를 누르세요'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는 정신이 사납다. 물론 단어란 많은 경우에 동의어가 있기에 '샵'과 '우물정자'는 동의어이므로 두 가지를 섞어 써도 된다. 그러나 같은 안내 지시 안에서라면 같은 말을 쓰는 것이 좋겠다.
이제 결론을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지금 새삼스럽게 '넘버사인', '해시', '파운드사인' 같은 정통 영어를 쓰자는 건 지나치게 인위적이어서 찬성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샵', '샾' 아니면 '우물정자'가 남는다. 정말이지 국어사전에 올라 있는 '샤프'는 피하고 싶다. 그건 억지라고 생각한다. '샵'과 '샾' 중에서는 '샾'에 지지를 보낸다. 이는 외래어 표기법을 거역하는 위험한 발상일 수 있겠지만 표기법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대중의 언어 습관이라 생각한다. '샵'보다 오히려 '샾'을 왜 사람들이 즐겨 쓰는가. 분명 이유가 있다. '샵'은 shop 즉 상점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상점이 아니라 #일 뿐인데 상점이 떠오르니 '샾'을 쓰는 것 아닐까. 외래어 표기법도 충분히 존중되어야 할 이유가 있지만 결국은 사람들이 가장 즐겨 쓰는 것을 우선해야 할 것이다. 외래어의 받침에 'ㅋ, ㅌ, ㅍ'을 쓰지 않는다는 규칙에도 예외가 인정될 만하다고 본다. 아무리 국어사전이 '샤프'를 쓰라고 해도 '샾'을 쓰는 사람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국어사전만 독야청청 '샤프'를 외칠 뿐.
'샵'과 '샾' 중에서 '샵'은 이도 저도 아닌 것으로 보여 찬성하고 싶지 않다. 이왕 현실을 존중해야 한다면 '샾'을 지지한다. '샾'이라고 적으면 '샾이', '샾은', '샾을'의 발음을 '샤피', '샤픈', '샤플'이라고 해야 하지 않냐는 반론이 바로 튀어나올 것이다. 그건 '샾'이란 단어는 '샾이', '샾은', '샾을'이 [샤비], [샤븐], [샤블]로 발음된다고 하면 된다. 우린 '좋은'의 표준 발음을 [조흔]이 아니라 [조은]으로 하고 있지 않는가. 그와 다를 바 없다.
외래어 표기법 총직 제5항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하되 그 범위와 용례는 따로 정한다."라고. #에 대해서 '샾'을 관용으로 인정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는 격언은 여기서도 유효하다. 물론 '우물정자'도 버릴 필요가 없다. '샾'과 '우물정자' 중에서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된다. 마치 휴대전화, 휴대폰, 핸드폰을 섞어 쓰듯이. 국어사전에서 '샤프'는 내려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