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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는 '사퇴'하는가

'포기'가 더 알기 쉽지 않나

by 김세중

민법은 수많은 법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법이다. 로스쿨생들이 연마해야 하는 과목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민법이라고 한다. 민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민법이 낡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곳곳의 조문들이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게 씌어 있다. 1950년대에 제정된 법이니만큼 1950년대식 표현이 많다. 안 고치고 그대로 쓰고 있다. 필자는 민법의 여러 조에 나오는 '사퇴'라는 말도 문제 있다고 생각한다.


'사퇴(退)'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이렇게 뜻풀이되어 있다.

「1」 어떤 일을 그만두고 물러섬.

의원직 사퇴.

공직 사퇴.

관련 책임자의 사퇴를 요구하다.

「2」 사절(辭絕)하여 물리침.

나는 그때나 이제나 누가 술 먹자는데 거절을 한다든지 사퇴를 한 적은 별로 없다. ≪변영로, 명정 40년≫


'사퇴'는 (1)과 (2) 중에서 주로 (1)의 뜻으로 쓰인다. '의원직 사퇴', '공직 사퇴', '책임자의 사퇴' 등이 '사퇴'가 쓰이는 전형적인 예라 하겠다. (2)의 용례는 1953년에 간행된 변영로의 수필집에 나오는 것으로 '사절하여 물리침'이라는 뜻으로는 '사퇴하다'가 오늘날 그리 잘 쓰이지 않는 듯하다.


'사퇴'에 대해 그쯤 알아두고 민법 제927조를 살펴보자. 민법 제927조는 민법 제4편 '친족'의 제4장 '부모와 자' 중에서 제3절 '친권' 제3관 '친권의 상실, 일시 정지 및 일부 제한'에 나온다.


제927조(대리권, 관리권의 사퇴와 회복) ①법정대리인인 친권자는 정당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법원의 허가를 얻어 그 법률행위의 대리권과 재산관리권을 사퇴할 수 있다.

②전항의 사유가 소멸한 때에는 그 친권자는 법원의 허가를 얻어 사퇴한 권리를 회복할 수 있다.


부모는 미성년자인 자녀의 친권자이다. 대원칙이다. 또한 친권자는 미성년자인 자녀의 법정대리인이다. 민법 제916조는 자녀의 재산은 법정대리인인 친권자가 이를 관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럼 제927조는 무엇인가? 친권자는 정당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자녀의 법률행위에 대한 대리권과 재산관리권을 법원의 허가를 받아서 '포기'할 수 있다는 뜻이다.


'포기'라는 표현이 적당한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부모이기 때문에 의당 갖게 되어 있는 권리를 안 갖겠다고 할 수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조문의 '대리권과 재산관리권을 사퇴할 수 있다'라는 표현이 과연 적절하냐는 것이다. '권리를 사퇴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국어사전 뜻풀이 (1)과 (2) 중에서 (1)은 확실히 아니어 보이고 (2)의 뜻인 것 같기는 하다. 대리권과 재산관리권을 '사절하여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니까. 그러나 사전에 있다고 해서 문제가 없을까.


'대리권과 재산관리권을 사퇴할 수 있다'보다는 '대리권과 재산관리권을 포기할 수 있다'고 할 때 훨씬 뜻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나. 그냥 그대로 두더라도 국어사전의 '사퇴'의 뜻풀이 (2)를 근거로 쓸 수 있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읽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이다. 민법은 모든 사람에게 다 의미 있는 법이다. 특정 직업이나 특정한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민 누구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대리권과 재산권을 사퇴할 수 있다'고 해서 마치 구름 속에 감추듯 속뜻을 알기 어렵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민법에는 국민이 쉽게 이해할 수 없게끔 슬쩍 뜻을 감춘 조문이 너무 많다. '대리권과 재산관리권을 사퇴할 수 있다'도 그런 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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