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영, 집안일과 육아는 절반씩 분배가 안 돼. 나도 둘째 낳고 남편이랑 정말 많이 싸웠는데 결국 해결 방법은 사람을 쓰는 거였어.”
한 선배가 해준 말이었다. 아이 한 명을 낳고 복직한 2014년, 하루하루가 진이 빠질 때였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우는 아이 친정엄마께 맡기고 출근하고 회사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재워야 하는 세 살 아기가 있었다. 아이는 하루에 옷을 두세 번씩 갈아입어 빨래는 산처럼 쌓이는데 평일에는 빨래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친정엄마가 아이 빨래를 해주셔서 겨우겨우 일상이 유지됐다. 청소, 아이 반찬, 어른 빨래, 분리수거 등등. 무엇 하나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자 선배들의 빳빳한 와이셔츠를 보면 누가 다려줬을까 생각했다. 부부의 역할 분담이 전형적인 남녀의 성역할로 분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선배들을 보면 부럽기도 했고 난 그들에게 이해받기 어렵겠다 피해의식이 생기기도 했다.
두 번째 휴직. 아이가 어릴수록 집안일의 양도 많아지는데 아이가 둘이 되니 제곱이 되는 느낌이다. 아이 둘을 밥만 먹였는데도 진이 빠지는데 그때마다 서른이 되어 결혼할 때까지 밥을 차려주신 친정엄마의 노고가 떠오른다. 반찬 투정을 하면 왜 엄마가 화를 냈는지 이제 알 것 같다. 아 이제야...
아이가 둘이니 빨래는 이틀에 한 번씩 돌린다. 세탁기가 다 돌아가면 널고 마르면 접고. 청소를 하고 소파 밑에 들어간 아이 장난감들을 꺼내 정리하고 아~주 가끔 물걸레질을 한다. 큰아이 반찬을 만들어야 하고 작은아이 이유식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다보면 내 밥은 늘 뒷전이다. 왜 엄마들은 남은 밥을 먹는지 아는가. 자기 밥을 먹을 시간이 없어서다.
최근 유치원 친구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집안일은 반반씩 안 돼. 사람을 쓰는 것도 또다른 스트레스야. 결국 방법은 하나야.” “뭔데?” “기계를 들이는 것.”
그 말을 듣고 물개박수를 쳤다. 정말 여성 해방은 가전제품이 가져다줬구나. 우리 둘은 새로 나온 빨래 건조기를 꼭 사야 한다며 맞장구쳤다. 마침 최근 신문 경제면에는 날개 돋친 듯 팔리는지 건조기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는 사진이 실렸고 다른 기업도 건조기 생산을 시작했다는 기사도 실렸다. 역시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 식기세척기, 빨래 건조기, 로봇청소기는 복직 후 꼭 구매해야 할 ‘가사노동 기계’들이다.
본인이 먹을 이유식을 보는 둘째.
집안일... 해도 태가 나지 않는다고 다들 말한다. 매일 해야하는 반복된 작업이지만 안 하면 생활이 불편해지는 일. 휴직하고 주부로 지내며 음식을 하고 아이를 돌보면서 그동안 내가 집안일의 중요성을 얼마나 몰랐는지 깨닫는다. 항상 가사노동에 대해 생각하면 ‘왜 분배가 절반씩 안 되는가’에 분노에 집중했었는데(;;;;) 요즘 집안일에 제법 흥미를 느끼게 됐다. 내가 인터넷 레시피를 따라 해도 제법 맛이 나올 때, 그걸 가족들이 맛있게 먹을 때, 음악을 틀어놓고 경쾌하게 설거지를 하고 그릇이 깨끗해지는 것을 볼 때, 시금치를 생협에서 마트보다 싸게 살 때, 빨래를 가지런히 접어놓을 때 같이 단정해지는 기분을 느낄 때 등.
그런데 역시 그런 경쾌하고 단정한 마음을 한 번에 후려치는 말들이 있다. 가사노동과 육아를 전담하는 ‘전업맘’ 며느리에게 “우리 며느리 놀잖아. 아들만 불쌍해 죽겠어” 같은 말들. 왜 가사노동이 노는 것인가! 육아가 어찌 노는 것인가! 내가 해본 어떤 일보다 힘든데 말이다. 남편도 훈련소 때보다 힘들다고 했다.
그러다 문득 집안일이 ‘우라까이 기사’(타사보다 보도가 늦어 타사 기사를 베껴쓰는 것) 쓰는 것 같다는 들었다. 반복되는 일이라서가 아니라 ‘인정받는’ 일이 아니라서. 그런데 매일매일 우라까이 기사를 쓴다면, 그래서 매일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으로 일한다면 그 일상은 어떨까. 사람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을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왜 근데 집안일과 육아는 사회적으로 대단하다고 인정해주지 않는가. 인정하는 순간 돈을 지불해야 해서 아닌가. 워킹맘들은 가사 노동 때문에 사람을 고용하거나 기계를 사지만 가사노동에 돈을 쓸 것을 결정하는 것도 결국 여자다!
친정엄마는 스물네 살 결혼하면서부터 가사노동을 직업으로 삼았으니 벌써 36년째다. 엄마가 음식을 만드시는 것을 옆에서 보면서 깨달았다. 집안일도 창조적으로 할 수 있다! 엄마는 밥을 차리면서 마구잡이로 음식을 놓지 않으신다. 식으면 안 되는 음식, 양념을 마지막에 가미해야 하는 음식을 다 구분하고 순서대로 놓으신다. 심지어 빨래도 엄마가 접으면 훨씬 깔끔하고 청소도 엄마가 하면 훨씬 깨끗하다!! 숙련 노동의 힘이겠지. 예전엔 ‘엄마 그냥 대충해요’ 한 적도 많았는데 이제 그런 말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엄마는 엄마의 노동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인데 누가 감히 ‘대충하라’고 하는가.
그러나 한편 두 아이를 기르면서 내가 인생 어느 때보다 많이 웃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엄마의 삶을 한편 부러워하게 된다. 이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한껏 보지는 못하게 될 내 상황이 과연 좋은 건가 되묻는 나를 볼 때 왜 아무도 내게 육아와 집안일이 이렇게 귀하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나 싶다. 이 귀한 일을 누가 폄하하는가.
주꾸미가 먹고 싶어서 주꾸미볶음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어릴 때부터 집안일이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집안일 지능’을 길러줘야 한다. 신혼 때 빨래하고 마른 수건을 접을 때마다 눈물이 났다. 결혼이라는 형식으로 독립해서 제대로된 집안일은 처음이었다. 이런 사소한 집안일도 엄마가 다 해주셨다는 걸 깨닫고선 엄마가 그립고 미안하고 보고싶어서 자주 울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대학, 직장까지 편하게 집에서 다니면서 집안일에는 거의 손대지 않았다. 엄마는 상견례 자리에서 “우리 애가 아무것도 할줄 몰라요”라는 의례적인 인사를 진심으로 했고 시어머니는 “요즘 다 그렇죠. 같이 살아가며 배우면 되죠”라고 하셨다.
다행인 건 남편이 신혼 초 나보다 ‘집안일 지능’이 높았다는 것이었다. 스무살 때 서울에 올라와서 그때부터 자취를 했던 남편은 김치찌개, 떡볶이를 만들 줄 아는 남자였다. 떡볶이를 얻어먹으면서 중고등학교 시절 청소와 설거지를 ‘아들의 일’로 규정하셨던 예비 시어머니를 감사하게 생각했다. 남편의 집안일 지능은 어릴 때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일하셨던 시어머니는 남편이 집안일을 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셨다. 지금도 내게 “경상이랑 같이 해라”고 말씀해주신다. 역설적으로 여자인 나는 집안일을 거의 안 해봐서 할 줄 몰랐는데 이것만 봐도 집안일 지능이 여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 테다.
나영석 피디의 <신혼일기>에서 구혜선 안재현 부부는 가사노동 문제로 다툰다. 신혼 초 가사노동을 분배하면서 벌이는 한국 부부의 전형적인 말다툼을 연예인들도 하는 것을 보면서 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꾼 남편보다는 걸레질 잘하는 남편이 최고지.’
한 출입처에서 일할 때였다. 진보적으로 알려진 한 인사는 ‘인권’을 목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잦았다. 남자 직원들만 회식 자리에서 모아 중요 의사결정을 하는 등. 오히려 내가 정치적으로 비판했던 보수적인 인사는 집안일을 잘 하는 남편으로 유명했다. 그때 타사 기자와 나눈 얘기. “목소리 높여 진보와 인권을 외치는 가부장 남자와 보수적이나 가사노동에 협조적인 남자, 누가 나은가?”
잘 모르겠다. 남편만 봐도 한국 남자 모두 집안일 지능이 낮은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부모, 주로 엄마가 어떻게 아들을 키웠는가가 집안일 지능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결론은 “아들들을 잘 키우자. 집안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어릴때부터 가르치자.” 아들만 둘 낳은 내가 귀담아 실천해야 할 말. 그래서 두진이는 빨래를 자기 손으로 빨래통에 가져다놓고 다먹은 그릇을 개수통에 가져다놓는 집안일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