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유리 Mar 02. 2017

북한, 중국, 라오스, 태국를 거쳐 온 15살 소녀

김유리가 만난 지구인18 _ 새터민 염은경


 

 15살 소녀가 혼자 탈북을 했다. 브로커를 따라 북한의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갔고, 라오스로 갔고, 국정원과 희망원을 거쳐 남한으로 왔다. 겨우 열다섯 살 소녀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남한으로 와서 학교를 다녔다. 따뜻한 사람도 있었지만, 새터민이라고 차별하고 무시하는 사람도 그 못지않았다. 10대 소녀가 겪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모든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난 스무 살 염은경은 조금도 비뚤어지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새 구두를 사고, 예쁜 옷을 좋아하는, 그저 평범한 여느 스무 살과 같았다.  






   

Q . 저를 소개해주신 분이 누구세요? 

   

A . 이지연 사무국장님이요. ‘북민실’이라고 북한 인권과 권련된 재단의 사무국장님이세요. 예전에 장대현 학교 영어 선생님이셨고요.    



Q . 장대현 학교는 어떤 학교인가요?    


A . 탈북청소년이나, 중국에서 태어난 북한 사람 자녀들이 다니는 대안 학교예요. 통일을 꿈꾸는 학교지요. 기독교 재단이고요. 수업 받는 건 다른 학교랑 평범하게 똑같은데, 통일 수업이 따로 있어요. 북한에 ‘장대현 교회’가 있었대요. 1893년에 지어졌구요. 평양에 김일성 동상이 있는 자리예요. 거기에 있는, ‘장대재’라는 언덕 이름을 딴 것 같아요. 통일이 되면 부산이 맨 끝이잖아요. 부산에서부터 다른 통일을 이뤄가면서, 나중에 통일이 되었을 때 그 자리에 다시 장대현 교회를 세우자는 의미로 부산에 장대현 교회가 먼저 만들어졌고요, 교회 이름을 따서 ‘장대현 학교’가 되었어요. 이름이 특이하고 통일 교육도 하고 그러니까 이단 아니냐는 말도 많이 들어요(웃음).   


 



Q . 일반학교를 다니는 거 보다 대안학교를 다니는 편이 더 좋았어요?  

  

A . 네, 더 편했어요. 일반 중학교를 3학년까지 다녔어요. 애들은 당연히 아는 건데 제가 모르는 게 많았죠. 제가 모르는 말도 너무 많고, 하는 놀이도 생경하고, 분위기도 낯설고요. 제가 성격이 활발한 편이라서 어울려 다니기는 잘했어요. 노래방 같이 가면 난 노래를 하나도 몰라요. 그래도 친하게 지냈어요. 따돌림 당하진 않았어요.     

처음 중학교에 왔을 때, 제일 충격적인 장면이, 애들이 수업 시간에 조는 거였어요. 북한에서는 수업시간에 존다는 걸 상상도 못했어요. 선생님이 왕이기 때문에 말을 안 들으면 무조건 얻어터지거든요. 근데 여기선 선생님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때려봐, 때려봐, 신고 할 거야, 이래요. 너무 놀랐어요. 대들면 선생님한테 혼나지 않냐니까 안혼난대요, 괜찮대요. 애들이 대통령 욕도 막 해요. 처음엔 놀라서 ‘그러다 잡혀가!’ 했더니, 애들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안 잡혀간다고. 그런 문화들이 저에겐 충격이었어요.  

  

필요에 의해 친구를 사귀는 것도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자기가 원하는 것만 공유하고. 아는 사람은 많아도 정작 내가 힘들 때 도와줄 수 있는 친구들은 몇 명 없다고 느꼈어요. 북한에서 젤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아빠가 탈북하고 나서 너무너무 힘들 때 그 친구가 버선발로 뛰어 와줬어요. 도움도 많이 줬고요. 그 친구에 대한 고마움이 안 잊혀져요.   


  

Q . 사람들이 새터민이라고 자꾸 구별하지 않아요? 

   

A . 무시할 때도 많죠. 카페 처음 갔을 때, 되게 신기했어요. 신기한 건 신기한 건데, 사람들이 북한에 이런 거 있냐, 너 이런 거 못 먹어봤지, 무시하듯이 이야기해서 좀 그랬어요. 북한에서 왔다고 해서 다 못 살고 가난한 게 아닌데 무조건 못 살고 가난하고 못 배웠다고 생각하세요. 속상해요. 



Q . 장대현 학교엔 어떻게 가게 됐어요? 

   

A . 임창호 교수님이 탈북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를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기숙사제고, 학비도 면제고요. 학교 들어가 보니까 다들 나랑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서로 잘 아니까 서로 보듬어주고, 이해해주고, 고민을 공유했어요. 선생님들이 부모님처럼 24시간 같이 있으면서 항상 응원해주고 격려해줬어요. 


    




Q . 대안학교에서는 좋은 친구들, 선생님들이 많아도, 사회에 나왔을 때 당황하지 않았어요?  

   

A . 장대현 학교에서 일반학교랑 교류를 많이 했어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를 통해 한국사회에 대해서 더 알아가고, 적응하게 도와주고요. 더 많은 단체들이 도움을 주고 있어요. 학교는 온실 같은 곳이라 그곳을 벗어나면 아무래도 혼자 헤쳐 나가기 힘들잖아요.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한국 사람들과 많이 교류하고, 활동하고 해서,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는 것 자체는 두렵지 않았어요. 


    

Q . 부모님이랑 같이 이주해 온 건가요? 

   

A . 아버지가 제일 먼저 탈북을 하셨어요. 4년 후에 제가 왔고, 2년 후에 동생이 왔어요. 어머니는 남으셨어요. 많이 걱정돼요. 북한에서는 탈북 그 자체가 나라에 죄를 짓는 거예요. 반역자 자식, 더럽다, 죽어라, 왜 사냐, 나 같으면 죽겠다, 하는 소리를 매일 들었어요. 너무 힘들어서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어요. 탈북을 간절히 원한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먼저 가셨으니까 가족이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탈북한 날이, 김정일이 죽었다고 발표된 날이에요. 난 열다섯 살이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북한에 있어도 총살 될 것 같고, 탈북을 하다 죽어도 똑같아요. 혹시 살아서 한국 갈지도 모른다, 그게 유일한 희망이었어요. 


    

Q . 탈북 과정은 어땠어요?    


A . 같이 탈북 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난 어리고, 또 혼자 왔으니까 많이 겁이 났어요. 브로커만 내내 따라다녔죠. 중국이나 라오스나 말 통하는 사람도 없고, 또 항상 숨어 지내야 하니까 무서웠어요. 좁은 공간에 갇혀 있을 때도 많았고요. 한국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믿지 못했어요. 항상 의심하고, 경계하고, 심장이 콩알 만해져서 낯선 사람만 보면 피하고, 힘들게 왔어요. 북한에서 중국으로, 라오스로, 태국을 거쳐서 한국에 들어왔어요. 태국에 한국 대사관이 있으니까요. 탈북 같이 한 사람들이랑 태국 감옥도 가고 재판도 받았어요. 감옥 생활을 2, 3개월 정도 한 것 같아요. 태국 사람들 텃세가 심했어요. 물벼락 맞고, 도마뱀 던지고 그래요. 이불도 없이 맨땅에 자려고 누우면 옆으로 뱀이 기어 지나가요. 그래도 신기한 게, 있으니까 정이 들더라고요.   





Q . 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무슨 일 하고 계세요? 

   

A . 헤어디자이너가 꿈이었어요. 장대현 학교 가기 전, 17살에 미용사가 되려고 한 미용실에 취직을 했었어요. 근데 그때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앞으론 뭘 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Q . 어떤 상처였나요? 

    

A . 그 전에, 미용실에 면접을 보러 가면 다른 건 다 괜찮대요. 새터민이라고 이야기 하는 순간 ‘생각해 보겠다’ 해요. 안 된다는 거잖아요. 자신감이 점점 사라졌어요. 그러다가 한 미용실에서 초보자도 괜찮고 일 배우고 싶은 사람도 괜찮다고 했어요. 규모도 좀 컸고요쉬는 날 없이 하루에 12시간 일하고, 한 달에 50만원 준다고 했지만 너무 좋았어요. 그래도 날 써주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요. 나랑 상의한 일은 아니지만, 미용학원에 등록도 해줘서 그것도 고마웠어요.     


일이 힘들고 무시도 많이 당하고, 가끔은 욕도 먹어도 일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좋았어요.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했어요. 12시간 일 끝나면 원장 안마해주고, 두피 마사지도 해줬어요. 그러다 미용학원에서 어떤 조선족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내가 다니는 미용실에 면접을 봤대요. 원장이 그러더래요.     


‘ 조선족은 40만원을 주고도 안 쓴다, 지금 17살짜리 새터민 애가 하나 있는데 진짜 열심히 한다, 한 달에 50만원만 줘도 12시간도 넘게 일을 한다. 근데 너희 같은 조선족은 그만큼 돈 줘도 열심히 안 할 거다’    


그 말이 가슴에 콱 박혔어요. 저는 마냥 고마왔는데, 원장한테는 50만원만 줘도 바보같이 일하는 인력에 불과했던 거죠. 배신감이 들었어요. 난 정말 믿었는데, 코피 터지고 다리가 퉁퉁 붓고 팔목도 아프고, 뼈 부러지도록 일했는데,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날 이용하려고만 했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요. 그 미용실에선 장애인도 일해요. 이해도 잘 못하시고 손도 잘 안 돌아가는 분인데, 나처럼 비슷하게 일해요. 원장은 그걸 자랑스러워했어요. 아무도 안받아주는 탈북자와 장애인을 받아준다고요.     


더는 일 못하겠다고, 그만둔다고 얘기하니까, ‘돈을 다 갚고’ 나가래요. 그 50만원 하는 월급도 안준 상태에서. 돈 안준다는 것도 억울한데, 돈을 갚으래요. 밥 주고 미용학원 보내 준 돈이요. 안 그러면 못나간대요. 자기는 노동부에 고위직도 알고 친한 사람도 많아서, 내가 거기 가봤자 서류 접수도 안 될 거래요. 그때는 그게 진짠 줄 알았어요. 학교에 말하고, 지인 분들 도움으로 겨우 일을 그만 둘 수 있었어요. 월급, 결국 못 받았어요.     





Q . (치솟는 분노를 겨우 진정시키고 고용주를 처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20분이나 이야기함) ..... 휴우 ..... 지금 가장, 행복한 일은 뭐예요?    

 

A . 핸드메이드요. 팔찌라던가 목걸이 만드는 거 그런 거 좋아해요. 한국에 오니 예쁜 팔찌나 액세서리가 참 많아요. 인터넷에 찾아보니 재료 값 몇 천원이면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거예요. 부산진시장 가서 재료 사와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작은 거지만 기부하기도 해요. 만드는 거 하고 있으면 속상한 일도 울고 싶은 일도 다 잊혀요. 그때가 제일 행복해요. 나중에 공방 하나 차려서 기부도 많이 하고 싶어요, 한 부모 가족, 어린이 보호시설 쪽에요. 저처럼 경제적이든 심적으로든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누군가에겐 별것 아닌 50만원이었다. 한 인간은, 별것도 아닌 그 돈을 떼어먹었다. 몇 년 전 최저임금을 고려해봤을 때 그녀가 받아야 했던 돈은 한 달에 174만 9천6백 원이다. 새터민이라는 이유로 한 인간은 법을 어기고 인간의 도리를 저버렸다. 피해자는 염은경, 한 사람 뿐만 아닐 것이다. 편견과 차별은 시선을 넘어,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의 경계를 만든다. 소수자는 소수자라는 이유로 침묵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그런 사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을 도우며 살고 싶다고 말한다. 깊은 배신으로 그녀가 배운 것은 남한테 같은 짓을 하지 말아야 겠다는 것이고, 그녀의 고용주가 선물 받은 것은 ‘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구나’하는 악의 씨앗이다.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는 그 문화의 ‘격’을 나타낸다. 우리의 ‘격’은 어디쯤에 있는가?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부산문화재단의 문화다양성 확산을 위한 무지개다리 사업 일환으로 추진됩니다. 
 우리가 속칭 ‘소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어쩌면, 인종이나 민족, 장애, 성별, 외모, 학력, 가족 구성, 지역, 사회적 신분 등 
 사회가 정한 틀에 의해 소수자로 분류된 건 아닐까요. 
 김유리의 지구인 프로젝트는 우리 모두 다 소수자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부산에 살고 있으면서 사회적 편견을 경험한 40인의 지구인 에피소드’를 기록해 
 그동안 깨닫지 못했거나 무관심 했던 우리 안의 배타성에 대해 함께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부디 40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마음에 작은 파도가 일렁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_ 부산문화재단 × 김유리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신이 내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